시간 앞에서 거인은 없다
시간 앞에서 거인은 없다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1.10.1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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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행복칸타타
두려움 없는 삶이 있을까요?

며칠 전 어느 모임에서, 직면하고 있는 두려움들에 대해 은근슬쩍 나열해 본 적이 있습니다.

1. 이런저런 거절을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2. 쓰라린 상처를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3.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순간들을 두려워하는 마음

4. 너무도 끈질긴 잘못된 습관들 때문에 두려워하는 마음

5. 썩은 동아줄보다도 약해빠진 의지의 문제로 두려워하는 마음

6. 때로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험하기만 한 관계들로 두려워하는 마음

7. 날마다 씨름해야만 하는 일과 과업들로 두려워하는 마음

8. 육신을 쇠잔케 하는 질병 때문에 두려워하는 마음

9. 절해고도(絶海孤島)에 달랑 혼자인 것만 같은 고독의 감정으로 두려워하는 마음

10. 자꾸만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우울의 늪에 빠질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11. 모래시계처럼 흘러내리는 시간의 작아짐을 보며 두려워하는 마음

마지막 열한 번째로 언급했던 두려움에는 모래시계가 나왔었죠? 그것과 연관된 개인적인 추억으론 사우나탕에서 자주 보게 되는 모래시계와 최민수와 고현정과 박상원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 1980년대를 배경으로 했던 TV 드라마 ‘모래시계’와 연간 6천만원가량의 유지 보수비가 드는 것 때문에 현재는 멈추어 있다고 하는 정동진 바닷가의 명물 모래시계가 떠오르기도 하는군요.

인생의 수면 위로 끊임없이 떠올라서 삶을 긴장시키는 두려움도 결국은 시간의 문제, 그러니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위기의식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남조의 시 ‘겨울바다’가 떠오릅니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미지(未知)의 새/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그대 생각을 했건만도/매운 해풍(海風)에/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허무(虛無)의/불/물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나를 가르치는 건/언제나/시간……./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하략)

시인의 말대로 우리들을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입니다!

평생 착하게만 살던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유를 납득할 수 없어 물어봤다지요. “왜 제가 이곳에 와야만 합니까? 저는 다른 사람들 가슴에 못을 박은 적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지은 죄는 시간을 낭비한 죄요.”

화용월태(花容月態)의 아름다움도, 역발산(力拔山)의 힘도 또박또박 흘러가는 시간 앞에선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당장, 오늘 하루의 시간만큼이라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눈부시게 푸른 가을하늘처럼 높아만지는군요. 시간 앞에서 거인(巨人)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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