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철거 100년… 복원 관심 고조
강제 철거 100년… 복원 관심 고조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1.10.13 1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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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의미·가치 정립하자
(좌) 1913년 모충동에서 남주동쪽으로 바라본 청주읍 전경 (우) 중앙공원 안에 있던 옛 충북도청
청주읍성 유물이 곳곳에서 발굴되고 있는 가운데 청주읍성 복원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철거된 지 100년이 되는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복원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도 크다.

하지만 청주의 역사성과 정체성 확립이라는 미명 아래 무조건적인 청주읍성 복원이 진행되는 것에는 우려감도 낳고 있다.

이런 우려감 속에는 청주읍성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확립되지 않은 채 반일감정에 의한 복원요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지적이다. 또 1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청주의 번화가가 되어버린 도심구조 속에선 복원가능성 자체가 희박하다는 의견이다.

그럼에도 고도 청주역사는 물론 충북역사의 정체성 확립과 주체성 회복 차원에서 청주읍성 복원의 힘을 받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로 고려와 조선시대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청주권 역사문화가 바로 청주읍성과 그 언저리에서 물길을 생성하는 원천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주읍성이란 공간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짚어봄으로써 앞으로 추진될 청주읍성 복원방안과 사업추진에 커다란 밑그림을 그려보는 논의로 점화되었으면 한다.

◆ 역사적 의미의 청주읍성
1. 청주읍성 안 성안길은 현재 청주 최고의 번화가로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유현덕기자2. 호서전도에 나타난 청주읍성3. 충청도읍지의 청주목지도 속 청주읍성 4. 1872년 청주목지도에 나타난 청주읍성



조선시대 석성으로 쌓은 청주읍성은 1911년 일본의 강제 철거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도심 한가운데에 철옹성처럼 박혀 있던 청주읍성은 이제 고지도나 옛길로만 역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물질적 의미의 읍성은 사라졌지만 청주읍성이 있던 자리는 조선시대를 거슬러 올라 백제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제의 상당현과 통일신라의 사원경성 축조가 신봉동 일대와 더불어 청주 성안길을 중심으로 한 청주읍성 자리로 추측되고 있다.

고려시대 역시 국보 용두사지 철당간이 제작될 정도로 읍성 자리는 청주의 정치·행정 등의 중심지였다. 천년의 세월을 증명하듯 서 있는 중앙공원 압각수와 공민왕이 청주 관아의 부속 누정인 취경루(현재, 망선루)에 과거 합격자 방을 붙였던 곳으로도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시대를 거치며 청주의 중심지로 자리잡은 터는 조선으로 들어서며 돌로 쌓은 성이 완공된다. 성의 나라 조선은 각 군현의 치소(治所)에 읍성을 쌓도록 하였는데, 청주읍성은 성종 18년인 1487년 2월에 완공되었다. 성은 현재의 청주시가지에서 무심천(옛 대교천)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성곽은 높이 4m, 길이 1천783m로, 현무문(북문), 청남문(남문), 벽인문(동문), 청추문(서문) 등 사대문을 두고 위용을 뽐냈다.

성의 축조로 청주읍성 안에는 청주목사가 집무하던 청녕각, 망선루, 객사 등이 조성돼 청주의 행정과 경제, 문화가 성을 중심축으로 더 단단한 철옹성을 구축한다.

 여기에 효종이 군사정비를 감행하며 1651년에 충청도 54개 고을의 육군을 총괄하는 충청도병마절도사의 주둔지인 병영을 청주로 옮김으로써 청주의 위상은 한 차원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으로 국가기반이 흔들릴 때 청주읍성은 전국에서 왜군과의 싸움에서 첫 승리를 거두는 격전지로 기록돼 청주역사의 정체성을 확고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1년 청주읍성은 승자와 패자의 뒤바뀐 역사의 아이러니를 안고 허물어지는 비운을 맞았다.

신제인 '터' 역사연구팀장은 "고지도를 보면 청주권역이 연차적으로 읍성을 축으로 확산돼 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며 "이는 오랜 기간 권력의 중심지로 자리잡은 청주읍성이 충북 역사의 뿌리로 작용해 왔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또 "청주성 탈환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더라도 청주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며 "사라진 읍성을 복원하는 데는 일제강점기에 헐린 유산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고려와 삼국시대 이전까지의 역사적 의미를 가미해 시대의 폭을 넓혀 가치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 공간으로 보는 청주읍성

역사의 의미와 더불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로 공간에 대한 재해석이다. 읍성이 있던 자리는 현재 청주 최고의 시가지다. 젊음의 거리이자 지역 경제와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성은 사라졌지만 지금의 읍성자리는 성안길을 따라 조성된 청주상권이 보이지 않는 철옹성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100년 전 읍성이 있던 이곳은 조선시대 청주 권력자들의 공간이었다. 당시엔 권력이 우선이었던 이 공간은 시대 흐름만 바뀌었을 뿐 최고의 자리를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청주읍성의 안과 밖을 공간적으로 구분한다면 성 안쪽엔 청주목사와 병마절도사 등 권력집단의 공간이었고, 성 밖은 권력에서 배제된 서민들이 살아가는 삶터 공간이었다. 성곽을 사이에 두고 큰 층위의 계급문화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전우영씨는 책 '서울은 깊다'에서 "성벽은 성안과 성 밖을 구분짓는 공간적 경계선이었을 뿐 아니라, 그 안의 사람들과 밖의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해 주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계선이기도 했다"며 도시의 성을 성(聖)과 속(俗)의 경계선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의미를 확대해 본다면 무소불위의 권력 공간을 시민의 힘으로 복원하자는 최근 여론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도 느껴진다.

빛바랜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시작에는 역사적 타당성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계한 시민의 공감대가 중요하다. 청주읍성 복원의 목소리에는 역사성 회복 기저에 지역관광자원으로의 문화콘텐츠도 간과할 수 없다. 중첩된 복원 이유 속에서 청주읍성의 의미와 가치를 올바로 확인하고 새롭게 공간을 재해석한 복원방안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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