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구, 오늘 당신을 기리고 싶다
이춘구, 오늘 당신을 기리고 싶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11.09.22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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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一筆
역시 병마 앞에선 저승사자도 재간이 없나 보다. 갑작스럽게 전해진 이춘구의 죽음, 적어도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자못 놀라워하면서도 동시에 많은 것을 기억해 냈다. 현역 시절 그의 이미지가 워낙 강했던 만큼 그에 대한 사람들의 추억 또한 또렷하기만 하다. 오랜 세월, 세상과 담을 쌓아 이젠 잊힐 때도 되었건만 말이다.

이춘구, 그는 참으로 별났다. 말 그대로 저승사자를 연상시키는 풍모로 한 시대를 풍미하더니 권력이면 권력, 힘이면 힘, 이것의 최고 정점이던 지난 96년 돌연 우리 앞에서 사라졌다. 그것이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었는데 15년 만에 갑작스러운 부고(訃告)로 이름을 다시 알려온 것이다.

12·12사태와 5·17쿠데타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서도 신군부의 핵으로 떠오른 것이나, 이후 5, 6공을 거쳐 YS의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줄곧 요직을 맡아 온 것도 이춘구만의 독특한 이력이다. 때문에 그를 아는 사람들은 격동기의 이러한 족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 이른바 원죄(原罪)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정치인으로서의 '이춘구'를 얘기할 땐 아낌없는 호감을 숨기지 않는다.

문제의 원죄라는 것도, 사람들은 암울했던 시절의 어쩔 수 없는 부역쯤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이춘구에게만큼은 유독 정서적으로 후하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가 기억하는 이춘구는 늘 똑같다. 공인으로서 누구보다 청렴 강직한 원칙주의자였고 청탁과 민원에 의연했을 뿐만 아니라 아부나 아첨을 철저히 멀리했다. 6공땐 황태자 박철언의 일탈을 놓고 노태우에게 쓴소리를 하며 대통령 초청 모임에도 불참할 정도로 소신의 소유자였고, 96년엔 5·18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전두환·노태우가 구속에까지 이르게 되자 "더 이상 정계에 남을 염치가 없다"며 전격 은퇴함으로써 신의와 의리의 표상으로 회자됐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국회 근처엔 얼씬도 안 했다.

신한국당 대표이던 95년, 6·27 지방선거 패배를 들어 사의를 표명하자 YS는 극구 만류했지만 그는 당시 한승수 총리에게 사표를 제출하며 끝끝내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5, 6공과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숱한 정치인들이 부정·비리사건에 연루되는 와중에서도 그는 단 한번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다.

이처럼 워낙 주변관리에 철저했던 터라 그에겐 유난히 야사(野史)와 야담(野談)들이 많이 달린다. 하나같이 크게 현양되고도 남을 법하지만 정계 은퇴자의 도리, 이른바 칩거를 끝까지 고집하는 바람에 이춘구에 대해선 사실 그동안 소홀히 다뤄진 측면이 없지 않다.

정계은퇴 후 충북의 여러 언론들이 그와의 인터뷰를 기획했지만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한 신문사는 작심하고 무려 두달여 동안 접촉을 시도하다가 비서로부터 "자꾸 그러시면 제가 죽습니다"라는 하소연을 듣고 역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공인으로서는 최고이지만 개인으로선 '개판()'이라는 측근들의 증언에서도 그가 얼마나 정치인으로서 바른 삶을 살아왔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춘구가 집에서 식사할 때는 찬물에 밥을 말아 반찬 한두 점 집어 먹는 것으로 끝냈다고 한다.

정작 우리가 이춘구를 기억하려는 이유는 그가 영호남으로만 양분된 정치·권력구도에서 충청인의 기백과 근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줬고 충청인 스스로가 이를 긍지로서 받아들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시류에 타협하거나 변절하지 않았고 자신의 안위를 먼저 꾀함을 정치인의 가장 큰 수치로 여겼다. 어떤 상황에서도 비겁하거나 추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목이 말라도 도천의 썩은 물은 결코 먹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기리는지도 모른다. 이춘구가 두명만 있었으면 충청도가 일을 내고도 남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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