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이 진보에게 묻는다
곽노현이 진보에게 묻는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11.09.01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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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一筆
과연 곽노현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비관적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만약 문제의 2억원이 후보사퇴의 대가라면 그는 당연히 자리를 잃을 것이며, 반대로 그 돈이 본인의 주장대로 순수한 선의의 발로였다면 비록 실정법의 처벌은 면할지라도 도덕적 굴레는 결국 피할 수 없게 된다. 선거 때 마이너스로 재산을 신고한 그가 그저 살림에 보태 쓰라며 2억원을 건넸다는 주장을 국민들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곽노현이 구설수에 오르자 ‘보통 사람들’(?)의 반응은 아주 즉각적이었다. 하나같이 “아니 진보라는 사람들이....”를 되뇌며 진보와 돈의 관계에 극도의 알레르기를 보였다. 곽노현은 곧바로 배신자, 죽일X이 됐다.

진보에 대한 이런 강박관념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개혁과 변화, 혁신이 진보에 있어 만고불변의 모토이고 보면 진보의 가장 핵심 가치는 당연히 도덕성이다. 도덕적이지 못하면 개혁이니 혁신이니 하는 모든 것들은 한낱 허구에 불과하다. 곽노현은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그가 그토록 내세웠던 차별성 이른바 ‘깨끗함’에 결정적 하자를 드러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의 진보는 왜곡돼도 너무 왜곡됐다. 툭하면 삐져나오는 ‘좌익’, ‘좌빨’의 딱지는 차라리 살갑다. 이념의 강요된 변종은 나라가 정상적으로 되돌려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진다. 북한 체제도 마찬가지다.

정작 진보를 옥죄는 것은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몰역사, 몰가치한 고정관념이다. 이들은 아직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로서만 진보를 재단하려 한다. 그러면서 지적 우월성과 사회변혁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진보라는 무장을 즐겨하는 것이다.

맞다! 과거의 진보는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민주화는 물론 오늘날의 노동 여성 인권 복지 환경의 패러다임을 일궈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는 민주화라는 기치가 통치를 지배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끝으로 막을 내렸어야 했다. 그러지를 못함으로써 지금 진보는 양쪽 모두에게 치이는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 보수와 보통 사람들은 진보라고 하면 이슬만 먹고 살아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고, 진보 스스로는 여전히 민주 대 반민주, 민족 대 반민족의 낡은 구도에 빠져 배타적 위상만을 곧추세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도덕적이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할 진보가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천착해야 할 것은 이념의 지적놀음이 아니라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라는 것이다. 길거리에 담배꽁초 안 버리고, 대중목욕탕에서 아무데나 수건 버리지 말고, 길거리에 나앉은 비정규직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게 정작 진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때문에 만약 진보가 내년 대선에서 정권 탈환을 원한다면 지금처럼 해선 곤란하다. 독재정권 운운하며 4대강 삽질이나 비판하고 천안함을 들먹이며 보수와 대립각을 세우는 데만 몰입했다간 절대로 답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국민의 삶과 생존이라는 먹고 사는 근본적인 문제, 여기에다 대학생 백수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굴뚝에 올라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구할 수 있는 대안과 능력,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어림 택도 없다.

진정 진보의 가치는 티끌 하나 없는 순수함이 아니라 그 순수함에 마지막까지 다가가고 지켜내려는 의지와 저항이다. 돈을 모르고 사는 게 진보가 아니라 그 돈의 유혹과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신념이 정작 우리가 고집해야 할 진보인 것이다. 진보의 지지로 당선된 곽노현은 이를 어겼기에 이미 서울시교육감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

이 시대 진보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조국 교수는 좀 더 정직하고 좀 더 세련되고 좀 더 인간적인 진보가 되라면서 이렇게 외쳤다. “진보여 넥타이를 풀고, 배지를 던지고, 맨발로 뛰어라. 보다 낮은 곳에서, 보다 작은 손을 잡고, 보다 먼 곳을 내다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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