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use it is there
Because it is there
  • 충청타임즈
  • 승인 2011.08.18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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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一筆
지겹다 못해 말 그대로 징그러울(!) 정도로 비가 많이 온다. 여름의 시작인 지난 6월 1일부터 지금까지 전국 어디랄 것도 없이 50일 안팎의 강우 일수를 기록했다고 하니 전 국민이 거의 두 달이나 꼬박 비를 맞은 셈이다.

초유의 비 세례에 올해 특히 기승을 부린 건 산과 관련된 각종 사고들이다. 예기치 않은 산사태와 조난, 낙석 등의 사고로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사고가 날 때마다 사람들은 그 처참함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예전과는 아주 다른 현상에 대해서는 크게 의식하지 않는 눈치다.

순식간에 17명의 목숨을 앗아간 지난달 27일의 우면산 산사태는 이미 많은 언론에서 지적했듯 상식을 깼다. 우면산의 높이는 293m로, 여기저기 산재한 약수터와 잘 닦인 등산로로 평소 인근 주민들이 자기집 뒷마당 드나들 듯 즐겨 찾던 곳이다.

봉사활동에 나섰던 인하대생 9명을 희생시킨 춘천 산사태는 더욱 기가 막히다. 사태가 난 마을 뒷산의 높이는 고작 100m로, 우리 주변에서 눈만 돌리면 찾아볼 수 있는 구릉지 수준이다. 물론 단시간에 마치 하늘이 깨진 듯 퍼부은 비, 그리고 무분별한 개발행위가 원인이라지만 이 정도 높이의 산이 그처럼 엄청난 위력으로 민가를 덮치리라고는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주말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청주지역 사람들이 마치 산책하듯 오르내리는 대표적 산이 있다.

우암산과 부모산, 구룡산이다. 모두 시내 구역에 위치해 그만큼 시민들과 가깝다.

우암산의 높이는 338m이고 부모산과 구룡산은 232m, 163m이다. 만약 똑같은 여건이었다면 이번에 사태가 난 산들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굳이 이런 예를 드는 것은 산, 더 나아가 대자연의 불가지(不可知)를 차제에 한번 곱씹어 보라는 이유에서다. 늘 접하는 작은 산에조차 거기엔 우리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그 무엇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산에 오르면서 꼭 이유를 달려고 한다. 무슨 건강을 챙긴다느니, 정상에 오를 때의 성취감이니, 그것도 아니면 힘들여 걸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인내와 그 과정을 통한 삶의 새로운 체험 때문이니 하면서 각종 명분을 갖다 붙인다.

모두 다 맞는 얘기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개념으로만 접근한다면 산에 들어 가 봤자 말 그대로 나무만 볼 뿐이지 숲은 절대로 보지 못한다.

사람들의 이런 이기적 발상 때문에 주변의 산에 그저 산책로나 닦고 펜션을 지었다가 이번과 같은 산사태를 불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생적인 지향이기도 하겠지만 불가에선 산의 최고 덕목을 무념(無念)과 무상(無償)에 둔다.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그 잡다한 생각들을 뛰어넘는 몰입의 념(念)을 오히려 가능케 하고, 서로 주고 받으며 조건을 붙이는 이른바 보상(報償)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산은 제공한다.

산에는 무슨 생산성이니, 무슨 이익논리니, 무슨 실적이니 하는 것들이 없다. 그러니 회사에서 쫓겨나고 사업에 망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도 산이다. 산에는 오로지 넓은 포용과 받아들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도 사람들이 좀 가졌다고 오만해 하거나 좀 누렸다고 거드름을 피우게 되면 이번 산사태처럼 불편함의 본색을 드러낸다.

1924년 6월, "왜 죽을지도 모르는 산에 오르냐"는 질문에 "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Because it is there)"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섰다가 정상을 불과 200m 남기고 실종됐던 조지 말로리는 75년 만인 1999년에 거의 미라 상태로 발견된다.

말로리의 말, 그리고 그의 소설 같은 죽음… 산에 대한 경건함이 이보다 더 묻어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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