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적 논리가 아니라 진정성을 나누자
이분법적 논리가 아니라 진정성을 나누자
  • 연지민 <교육문화부장>
  • 승인 2011.08.01 2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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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연지민 <교육문화부장>

집중호우로 전국이 수해 현장이다. 서울 우면산 산사태가 그렇고, 강원도 산사태가 그랬다. 물과 흙이 들어닥치면서 도시는 일순 마비되었다.

충북 청원의 한 시골마을은 돌풍을 동반한 폭우로 30분 만에 쑥대밭이 되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멀쩡하던 마을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폭우는 또 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꽃같이 피어난 20대 젊은이를, 60대 힘없는 어르신을, 막 뛰어노는 아이까지 삼키며 생채기를 냈다.

수해를 직접 겪은 사람이나, 이를 방송으로 지켜본 사람이나 모두 안타까운 순간들이었다. 모든 국민이 그런 심정으로 지켜보았으리라 본다.

비보가 이어지는 가운데 요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을 들어보면 참으로 이상하다. 아니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충격이다. 다름 아닌 지난 집중호우로 죽은 모 회장부인에 대한 이야기다.

집에 물이 들어 차자 지하실을 살피러 갔다가 사고를 당했던 회장부인을 두고 일각에선 ‘부잣집 마나님이 왜 지하실에 들어갔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집에 일하는 사람도 있는데 회장부인이 직접 지하실에 들어간 것을 보면 귀중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이 추측은 날개를 달고 일명 사과박스(돈박스)이거나, 금궤이거나, 아님 물에 젖으면 안 되는 명화이지 않았을까 등등으로 상상의 나래를 편다. 그리고 이 상상은 듣는 이로 하여금 황당하다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타당성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연히 집에 일이 생겼으니 살펴보러 가는 게 사람 맘 아니냐는 대답이 오히려 무색할 정도다.

가난한 사람이었다면 애도의 마음으로 끝났을지 모를 상황이 부자이기에 겪어야 한다니 씁쓸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로 인해 더 씁쓸해지는 것은 ‘왜’에 붙어 있는 수식어 때문이다. ‘왜 들어갔을까’에 대한 우문.

우리 사회가 왜를 풀어내는 방식을 보면 서민을 자처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에 대한 왠지 모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싶다.

존경하기보다는 시샘이 더 큰 듯하고, 못 가진 것에 대한 불만이 부자를 바라보는 안티적 성향으로 드러나 사회 저변에서 단단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부터 강남부자로 인식된 그들과 우리의 괴리가 사회 계층으로 뚜렷이 구분된 채 계층 간 생각의 편가름을 가져오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는 우리나라 부자들이 지금껏 보여준 행동이 시민의식을 따라오지 못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급속하게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물질만능에 무게를 둔 경영방식도 현대식 사회 계층을 분리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존경할 만한 부자가 없다는 말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사회는 부를 쫓게 만들면서도 부를 경멸하게 만드는 이중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소설쓰듯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게 아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생명은 모두가 소중하고 평등하다고 말하고 싶다. 생명의 귀함을 누가 모를랴만, 모두가 귀함을 알고 서로가 서로를 평등하게 인정할 때 각자가 존중받을 수 있다.

남보다 조금 더 가졌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인간이 자연 앞에 얼마나 나약한지를 우리는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가진 사람은 나눔으로 베풀고, 가짐이 덜한 사람은 마음을 나누는 일이 사람을 살리는 진정한 일임을 다시금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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