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 인쇄한 청주 고려대장경도 발원
직지 인쇄한 청주 고려대장경도 발원
  • 한인섭 기자
  • 승인 2011.05.15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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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 베일 벗는 초조대장경 ■
고려 현종 1011년 2월 청주행궁 '연등회' 개최 착수

고려사절요·이규보 군신기고문 분석내용 일치 확인

김성수 청주대교수 논문 문헌정보학회지 게재 확정

충청타임즈 2008년 11월 학술고증 필요성 첫 보도

고려 최초 대장경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1011~1087년) 발원지가 청주라는 역사적 사실을 규명한 논문이 발표될 예정이다.

고려대장경 '1000년 베일'을 벗긴 논문은 고려사 절요 기사와 이규보(1168~1241)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고종 24년·1237년)'을 분석해 입증을 시도한 것이어서 국사교과서는 물론 문화사 분야 교과서 수정도 가능할 전망이다. 거란 침입에 맞서 국가 수호 차원에서 진행된 대장경 판각 동기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으나 발원지와 정확한 시점에 대한 역사적 규명과 연구 결과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성수 청주대 교수(문헌정보학과)는 5월말 발표될 한국문헌정보학회지(제45권 2호)에 게재한 논문 '고려 초조대장경 각판의 발원 장소 및 일자에 관한 연구'를 통해 "고려사 절요와 고려사,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을 분석한 결과 초조대장경 각판 발원 장소는 현종이 머물렀던 청주 행궁이고, 발원 일자는 1011년 2월 15일(음력)이라는 점이 입증됐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고려사 절요에 거란 침입을 받은 현종이 전남 나주까지 피란길에 올랐다 개경으로 환도했고, 1011년 2월 13일~23일 사이 청주행궁에서 머물다 2월 보름에 연등회를 올렸다는 기사가 있다"고 설명한 후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는 '거란의 군대가 스스로 물러가도록 신명(諸佛多天)이 보답하는 제사를 현종이 직접 올렸다'는 역사적 진실이 기록돼 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어 "신명에 보답하는 제사는 연등회이고, 제례에서 신명께 기고(祈告)한 내용은 바로 '초조대장경 각판 발원'이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며 "고려사 절요와 이규보의 기고문은 모두 역사적 진실을 담은 기록이라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이규보의 기고문에서 '거란의 군대가 고려를 침략하자, 남쪽으로 피란한 현종이 신하들과 함께 대장경 판본을 각성할 것을 맹서한 후에 물러 갔다'는 내용에 주목했다"며 "거란군이 침략한 1010년 12월말 현종이 남순(南巡·몽진)한 시점부터 개경으로 환궁한 1011년 2월 중순 사이 제사를 올린 사항 등을 기록에서 추적·검색하고, 검색한 내용을 이규보의 기고문 내용과의 관계를 분석해 규명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또 "현종이 개경 환도에 앞서 공식적 국가 의례인 연등회를 연 것은 민족적 단결과 모든 계층의 백성을 결속할 사상적 기반이 필요해 대장경 각판 발원이라는 기치를 내건 것"이라며 "대외적으로는 고려가 송(宋)나라처럼 대장경을 판각할 수 있는 고도의 문화국가라는 점을 거란에 부각시키려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청주에서 연등회를 개최했다는 기사가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점이 결정적 근거"라며 "전쟁 중에 국가 안녕과 태평을 비는 행사를 연 것은 거란을 물리치려는 의도였고, 발원 자체가 제물처럼 여겼던 것이 대장경이었다"고 말했다.

충청타임즈는 2008년 '살아 있는 직지-제2부 임진왜란은 활자전쟁이었나' 기획취재와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종림 스님 주장을 토대로 '고려대장경 현종 때 청주 연등회서 발원(11월 24일)'을 최초 보도했다. 이어 초조대장경 청주고인쇄박물관 특별전을 계기로 학술적 고증 필요성(2010년 8월 10일자)을 거듭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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