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의 德
절제의 德
  • 충청타임즈
  • 승인 2011.02.14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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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신서옥 <시인>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원을 가지고 산다. 행복하게 사는 길은 무엇일까?

이성의 판단으로 '행복하다' 규정지어도 감성의 판단은 불행한 것이 너무도 많은 것이 세상사요, 삶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해 주어도 행복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고 잘못해 줘도 상대방의 진정을 안다면 행복을 맛 볼 수 있다.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 즉 절제할 줄 아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넘치기 전에 욕심을 자제하는 것이 진정한 절제다. 넘친 다음의 절제는 절제가 아니라 놓음이고 가져본 자의 여유는 절제가 아니라 또 다른 놓음이다.

권력이나 재력 등 누려본 것을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역사나 주위를 살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안 해본 사람은 그 맛을 알지 못하기에 피상적 욕심과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해본 사람은 그 맛을 알기에 놓기가 더 어렵다. 그래서 해보고 나니 별거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아예 그 위치에 가 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의 위력을 모른다. 그러기에 조금의 어려운 장애가 와도 그 목표를 쉽게 포기한다. 하지만 해본 사람은 그 목적을 위해 어떠한 희생을 치러도 그것을 취하려 한다.

넘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곱씹어 보면 욕심의 극치이다. 그 욕심의 극치를 넘지 못하면 끝없는 욕망으로 파멸과 허기짐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알기에 놓을 수밖에 없다.

절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의 분수를 넘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절제는 조금 모자람의 아름다움과 만족을 느끼라는 것이지 고통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절제의 최고 의미는 만족이다. 그 만족의 의미가 이성적 만족이 아닌 감성적 만족을 이야기한다. 감성 만족은 자신의 크기로 만드는 것이기에 이성적 만족보다 한 차원 높은 이상을 구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어진 상황에 늘 감사하고, 주어진 삶을 찾아간다면 그 감사의 마음에 고마운 일이 흘러든다.

그리고 행·불행은 누구의 잘잘못이 아닌 자신이 만드는 허상의 하나이다. 우리가 사는 삶이라는 것이 어디 허상이 하나둘일까?

모든 것이 허상이요 진실이니 창조주의 영역을 건드리지 말고 우리 스스로 허상의 덫이 아닌 감성의 본능에 충실하게 흘러가 보자.

감성은 많은 고통도 주지만 무한한 감사도 준다. 그런데 그 감성의 단초가 자신의 마음의 가치와 의미의 부여라는 것에 있다.

이렇게 세상사의 모습은 삶의 그림을 어찌 그리느냐의 문제로 귀결이 되니 절제의 덕에서 오는 감사의 빛깔로 만족이라는 풍경을 그려보자. 고단한 삶에 따뜻한 햇살이 비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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