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오독(誤讀)
즐거운 오독(誤讀)
  • 충청타임즈
  • 승인 2011.01.3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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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박명애 <수필가>

부엌 유리창으로 햇살이 비스듬히 비껴들어온다. 그 온기 덕일까? 작은 유리컵에 담아둔 호야의 푸른 줄기마디에 실낱같은 뿌리가 내렸다.

한동안 꼭꼭 여며두었던 창을 열어본다. 우암산이 정겹게 다가온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희끗희끗 잔설이 남아 있는 풍경을 바라보려니 이사 오던 날 호들갑을 떨던 기억이 난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문득 내다 본 창으로 그림처럼 안겨오는 우암산 전경이 어찌나 반갑던지. 그런 행복도 잊고 살았구나 새롭다. 한 달 가까이 이어지는 지루한 강추위에 느린 평면 위에서 산 듯하다.

도시는 햇살 속에 눈부시다. 채 녹지 않은 눈을 이고 있는 집과 사물, 풍경들이 스스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들쑥날쑥한 건물들 사이로 무슨 볼일을 보는지 새들이 위쪽으로 쇄도하며 날아오른다. 깃털하나 스치지 않고 도시를 접수한 새들의 하얀 날개도 반짝 빛을 반사한다. 햇살에 봄기운이 실린 듯 안온한 느낌이 든다.

뽀드드드-----뽀드득"

추억 속에 남아 있는 정겨운 소리다. 내려다보니 건너편 골목입구에서 승용차가 회전을 하고 있다. 바퀴가 방향을 바꾸어 빙그르 돌자 소리도 따라 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적당히 습기 머금은 녹녹한 눈만이 내는 소리다. 천천히 눈이 녹는 모양이다. 맘이 설렌다.

딸아이와 모처럼 전통시장 구경을 갔다. 찬바람에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행인들 사이로 코끝이 빨갛게 언 채 소리 높여 떨이를 외치는 야채장수 리어카에는 배추가 얼어 있다.

아유 속은 괜찮아요. 겉은 요즘 다 얼지 어떻게 안 얼겠어."

빛바랜 줄기 사이 끼어 있는 말라비틀어진 귀뚜라미 다리 위에서 햇살이 반짝인다. 모든 것이 변화하면서도 잔존하고 생명의 파편들 위에서 삶은 계속된다. 송아지 무덤 위에 쌓인 눈들이 녹고 스민 자리에 봄볕 쏟아지면 새 잎이 피고 희망도 피겠지.

아직도 매운바람 창 흔드는 소리 요란한데 혼자서 봄빛을 읽는다. 오독(誤讀)이면 어떠랴.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았던 겨울이기에 얼른 지나가고 즐거운 봄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남녘에서 처음으로 동백꽃 소식이 올라왔다. 시들지 않은 채 툭툭 지는 동백은 땅 위에 떨어져도 붉게 피어 있으니 두 번 꽃이 피는 셈이라고 소식을 전하는 문화해설사의 얼굴에도 화사하게 생기가 돈다.

조금은 쓸쓸한 앞 베란다를 내다본다. 지난 가을까지 수런거리던 화분 속 친구들이 그립다. 꽁꽁 언 베고니아는 결국 한쪽 줄기를 뭉텅 잘린 채 거실로 피난 들어와 오후 햇살 속에 몸을 녹이는 중이다. 성급하게 뾰족 얼굴 내밀던 금낭화는 잠잠하다. 유례없던 무더위에 일찌감치 잎을 말리고 긴 잠에 들어간 은방울꽃은 봄 맞으러 나오려나.

웅크렸던 마음에 기지개를 켜 본다. 짱짱한 바람 속을 걸으면 마음이 맑아진다던 허세는 어디가고 연인을 기다리듯 봄을 기다린다. 마음에는 벌써 샘물처럼 봄빛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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