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 없습니다
할 말 없습니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11.01.27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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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문화콘텐츠 플래너>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고향집 부모님들은 지금쯤 이제 며칠 후면 먹고 사는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던 자식들 볼 생각에 떡가루 곱게 빻아 가래떡을 준비하는 일도 시들해졌을 테지요.

유난히 기승을 부린 동장군의 심술에도 굴하지 않고, 엄동설한 추위를 견뎌내며 겨우내 간직했던 먹을거리를 소담스럽게 담아 자식들 두 손 부끄럽지 않게 건네려던 정성도 무색해진 주인 노부부를 생각하면 삭풍 몰아치는 외양간에 몸을 움츠리고 살아남은 제 자신이 그저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나는 소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칸칸이 감옥 같은 좁은 사육장에 매어 있는 몸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온 나라 사람들을 식겁하게 만들고 있는 구제역이 나와 같은 짐승들에게 들 퍼지는 바람에 고향길마저도 안타깝게 만드는, 나는 소입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설마설마 하던 일이 마침내 형제 자매는 물론이거니와 부모 자식들마저도 오고 가지 못하게 만들 줄은 누군들 꿈에서라도 상상조차 했겠습니까.

나는 지금 인심 좋은 충청도의 남쪽 땅 한구석에 아직은 편한 목숨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왕래조차 워낙 드문 산골이라 아직 우리 마을의 소나 돼지들은 그럭저럭 몹쓸 병의 마수에서 겨우 모면해 있습니다.

그래도 저 아랫마을 수십 마리씩 소를 키우는 집에선 행여나 생명과도 같은 가축을 잃을까 봐 온 종일 소독약을 뿌려대는 것은 물론 사람들의 접근조차 막고 있으니 우리네 소들의 입장에서도 못 견딜 일입니다.

이제 음메- 소리를 내며 울어 댈 기운조차 없습니다. 주인집 안방에서 간혹 들리던 살처분과 생매장의 지옥과도 같은 소식은 이제 아예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 소식조차 지긋지긋해진 늙은 집주인은 뉴스 보는 일마저 차마 외면한 모양입니다.

이게 다 누구 탓일까요. 움직일 틈조차 용납하지 않고, 빼곡하게 축사를 가득 채워 그저 살아 있는 짐승들의 목숨 하나하나를 고깃덩어리의 무게로만 가늠하는 사람들의 욕심 때문일까요.

아니면 더럽기 그지없는 축사에서 제 맘대로 기승을 부리는 그 몹쓸 구제역 바이러스 때문인가요.

경북 안동에서 처음 발생한 돌림병이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한 사이 자동차에 실려 이미 걷잡을 수 없게 번진 탓인가요.

아무튼 결국 이렇게 되고야 말았습니다. 상아탑 대신에 '우골탑'이라고 소 팔아 대학공부까지 시켜 도시로 시집 장가보낸 자식들이 그래도 한 해에 겨우 몇 차례,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손자들 데리고 마지못해 찾던 고향길마저 이렇게 막게 될 줄은 누군들 알았겠습니까.

이번 설날에는... 학수고대하며 동네어귀의 인기척에 잘 들리지 않는 두 귀를 쫑긋 세우던 설레던 기다림조차 기대하기 어렵겠지요. 아니 어쩌면 늙으신 부모들은 먼저 전화를 걸어 고향집을 찾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가슴앓이를 하실지도 모릅니다.

살아 있는 채로 생매장되는 이 무지막지한 죽음의 세상 앞에 이제 우리 짐승들은 목 쉰 울음조차 울어 댈 기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모 자식 간의 만남조차 끊어놓은 처지가 되어 버린 짐승들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저 가축을 돈으로, 고깃덩어리로만 생각하는 인간의 탐욕 때문이라고 탓하기에는 그동안 우리들이 베푼 희생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우리도 엄연히 숨을 쉬는 생명체로 존중해 달라고까진 말하지 않겠습니다. 논밭 갈며 풀을 뜯고, 사람들 대신 무거운 등짐을 지던 본래의 모습으로 제발 우리 소들을 풀어 주실 수는 없는지요. 이제 서러운 설이 지나면 입춘이 되겠지요. 불 꺼진 문틈 사이로 늙은 부모의 한숨이 서러운 밤은 요 며칠 끊길 줄 모르는데, 새삼 속 깊은 정과 자유가 그립기만 한 추운 설날이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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