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생활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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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11.01.26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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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세상의 명리(名利)를 쫓아 사는 어른의 가슴 한구석에도 유년의 동화 같은 아름다운 꿈이 있다. 강아지 한 마리 키우며 온갖 정을 쏟고, 쳐다만 보아도 좋은 풋사랑 품고 세상을 보던 그때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남의 눈치를 보며 말을 가리고 때론 진심을 교묘히 속일 줄 아는 능숙함이 몸에 배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솔직함을 잃는 것이다. 염치와 절제를, 그리고 예의를 말하고 가르치지만 솔직함이 주는 청량감은 어느새 어른의 일이 아닌 게 되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덕의식은 일곱 살 유치원생이면 다 배웠다. 인사하는 법, 교통질서 지키는 법, 친구 괴롭히지 않는 것, 부모님 말씀 잘 듣는 것. 어른께 공손히 대하는 법,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적 배운 사람의 도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입으로만 알고 몸에선 지워버린 그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어른의 삶이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라는 말이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약점을 드러내는 말이 되어 버린 지 오래되었다. 어려운 책도 읽을 수 있고, 다양한 지식이 머리를 채우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고귀한 인사말을 우린 잃어가고 있다.

상대방을 쳐다보면 째려본다고 오해를 하고, 작은 규칙을 지키면 웃음거리가 되어 버려 고마워할 일도 미안할 일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 돈과 권력만 있으면 사소한 다툼은 법을 빌려 해결하고, 대단한 지식과 학벌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하면 된다. 쇠털같이 많은 법을 만들어 인간의 행동을 규제해도 감옥의 죄인은 줄지 않는다. 법의 심판을 받았다고 해서,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죗값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자신이 지은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라도 양심의 거울에 묻을 때 몸서리치며 냉혹한 반성과 참회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 어찌 보면 밥상머리에서 어머니 치맛자락 잡고 듣던 말씀을 되새기며 사는 것이 아닐까

많이 배운 사람이 더 도덕적이고 청렴해야 올바른 사회다. 그래야 배우지 못한 사람의 잘못을 무지라는 핑계로 관용을 베풀 수 있다. 바른생활이 도덕과 국민윤리로 제목을 바꿔 철학자의 사상을 가르친다고 해서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달라지고 작은 실천이 몸에 배는 것은 아니다. 떨어진 휴지를 줍고, 어른을 만나면 최소한 피우던 담배를 뒤로 감추는 행동이 사람의 관계를 편하게 하는 것이다.

지식이 행동을 정당화시키지는 않는다. 그것 또한 교묘한 자기 논리일 뿐이다. 잘못했습니다. 라고 부모 앞에서 고개 떨어뜨리는 꼬마의 순수함이 지식으로 포장된 화려한 논리보다 낫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는 '무지개'라는 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김현승 시인은 '아버지'라는 시에서 밖에서 손에 묻힌 핏물을 집에 돌아와 아이들의 얼굴에서 씻김을 받는다고 한다.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그 무언가가 어린이들의 얼굴에 있다. 영악하다는 말을 듣는 어린이의 말과 행동에는 어른들의 숨기고 싶은 진실이 있는 그대로 표현되어 당황하는 어른의 모습이다.

있는 그대로 흉내 내는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그렇게 비친 어른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 학교 폭력의 원인은 짓밟고 올라서면 과정은 개의치 않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따돌림을 당해도 내 아이가 아니면 되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며 가볍게 덮어버리는 모습은 어른들이 만든 이기적인 세상의 단면이다. 욕설이 난무하는 교실은 순화되지 못한 감정을 쏟아냈던 어른들의 가르침 덕분이다.

앙증맞은 원 복 맞춰 입고 참새 짹짹하며 걷다가 건널목에서 손을 귀밑까지 올리고 좌우를 살피는 녀석들의 모습에서 우린 아이들이 가르치는 도덕의 삶을 다시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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