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자국, 더 가까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 충청타임즈
  • 승인 2011.01.24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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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김송순 <동화작가>

지난 일주일 동안은 참 많이 바빴다. 아니, 그 전 주일에도 많이 바빴던 것 같다. 누구랑 점심 먹을 약속, 누구네 집을 방문하기로 한 약속, 어린 친구들이랑 만나기로 한 약속 등등. 약속을 지키느라 난 아픈 것도 뒤로 미루며 뛰어다녔다. 그런 와중에 날씨는 왜 그리도 추운지….

자가용이 아닌 버스로 이동해야 했던 나는 온몸으로 매서운 바람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러니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내 몸은 참으로 노곤했고, 간신히 세수만 하고 이불 속에 들어가면 다음날 아침까지 나오기 싫었다. 그러다 그 다음날에도 또 다른 약속을 위해 외출해야만 했다.

그런데 오늘은 약속이 없다. 온몸을 친친 동여 맺던 매듭들이 풀리는 듯한 여유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오늘은 늦게까지 잠을 잘 생각으로 새벽에 울어대는 알람을 일찌감치 껐다. 하지만 늦잠도 자 본 사람이나 자는 가 보다. 매일 일어났던 시간이 되자 정신이 말똥말똥해진다. 한참을 뒤척거려봤지만 잠이 다시 들 기미는 없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난 오늘 아무런 약속이 없으니까. 하루 종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으니까. 거실로 나오니 베란다가 햇살로 환하다. 난 콧노래를 부르며 바깥 유리문을 활짝 열었다. 유리문 앞에 몰려있던 매서운 찬바람들이 한꺼번에 거실 안으로 밀려 들어왔지만 나는 그리 싫지 않았다. 오늘은 밖에 나가지 않을 거니까. 그런데 유리문을 닫으며 돌아서다 난 그만 입을 쩍 벌리며 멈춰서고 말았다.

산세베리아!

그가 추운 베란다 유리문 앞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추위에 온몸이 꽁꽁 얼어, 그 싱싱하던 초록 이파리들을 끓는 물에 삶아 놓은 시래기처럼 축 늘어트리고 말이다.

"어? 네가 왜 이 추운 베란다에 있는 거야?"

황급히 다가가 들여다보니 예전의 산세베리아가 아니었다. 몸에 좋은 산소를 내뿜고, 실내 악취를 흡수해 주는 친환경 식물이라고 내가 아끼던 녀석이었는데…. 거실 안에 있던 녀석을 볕 좋은 날 일광욕시킨다고 밖으로 내놓고는 깜박 잊어버린 것이다.

"어떡하니? 진짜 미안하다. 죽지는 않은 거지?"

한숨처럼 중얼대는 내 옆으로 산세베리아의 가냘픈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내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어쩜 그리 까마득히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산세베리아가 열대 식물이란 사실을 난 알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모처럼 하루를 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오늘이었는데, 산세베리아에게서 온종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문득 내 안에서 잊혀가는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의 무관심으로, 나의 이기심으로 잊혀가는 그 사람들! 한때는 산세베리아의 건강한 초록잎처럼 풋풋한 사이였는데, 이제 그들에 대한 기억들을 손에 잡아보려고 하면 자꾸만 헛손질만 할 뿐 빈손이다.

잊힌다는 건 역시 슬픈 일이다. 누군가를 잊는다는 것도 슬픈 일이다.

산세베리아를 들여다보며 문득 다짐해 본다. 나에게서 잊혀가는 것들을 기억해 보자고. 내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 잊혀가는 것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자고. 그러면서 산세베리아에게 큰 소리로 부탁해 본다.

"제발 너의 그 아름다운 초록 이파리를 다시 나에게 보여 주렴."

※ 약력

동화작가

여백문학회 회원 뒷목문학회 회원

청주시 1인1책 펴내기 강사 초등학교 방과후 독서논술 강사

저서 : 모캄과 메오 달못에는 항아님이 살고 있대요 죽희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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