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정거장
아름다운 정거장
  • 충청타임즈
  • 승인 2011.01.03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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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박명애 <수필가>

눈이 내리던 날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을 보았다. 원제는 'The Last Station'으로 원작소설인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을 뜻하기도 하고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다 떠난 '아스타포보'역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원제가 더 마음에 와 닿는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마지막 일 년을 비서였던 '발렌틴 불가코프'의 시선으로 그려냈다. 젊은 날을 충동적이고 자유분방하게 보낸 톨스토이는 말년에 격변하는 러시아의 정세와 헐벗은 민중들을 바라보며 고통을 느낀다.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혁명의 폭력성에 반대했던 그는 사랑과 자비를 외쳤고 금욕주의를 선언했으며 자신이 꿈꿔온 이상을 위해 작품에 대한 모든 저작권과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만다.

그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한 아내 소피아와 그의 마지막을 위대한 죽음으로 장식하고 우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추종자들과의 갈등으로 톨스토이의 마지막 1년은 쓸쓸하고 불행했다. 아내의 권리를 주장하며 이미 쓰인 유서를 바꾸고자 끝없이 대립각을 세우는 소피아를 피해 무소유로 돌아가고자 탈출을 시도하는 그의 마지막 선택이 안타깝기만 했다. 엔딩이 애잔하면서도 감동적이었던 건 온갖 갈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이다. 숨을 거두기까지 아내 소피아를 그리워하는 톨스토이의 모습은 그가 끊임없이 문학작품을 통해 보여줬던 사랑에 대해 깊은 의미를 던져주었다.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 류샤오보 역시 차가운 감옥에 있지만 아내와 사랑의 시를 주고받으며 투쟁을 계속해오고 있다.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랑이 충만한 이에게 허기는 찾아오지 않는다. 집착도 미련도 없다.

우린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던 톨스토이의 목소리가 내겐 새해 화두다. 요즘 들어 예전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물질과 건강과 감정에 관한 일들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사유하고 고민하게 된다. 천천히 조금씩 집착으로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풀어내고 싶어진다. 사람과 관계한 모든 것들은 조금만 부주의해도 부서지기 쉽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냉정해지려고 노력한다.

올해엔 유난히 새해라고 해서 지난해와 선을 긋듯 경계가 명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수선 피우지 않고 살아가면서 내가 해야 할 의무들을 성실하게 실천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책상 위에는 새 달력과 새 다이어리가 놓여 있다. 다이어리의 붉은 표지 위에 이름을 적는다. 조용하나 뜨겁게 살고 싶다. 시간표에 따라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한다. 읽고 싶은 책 목록들도 적어두고 가까운 이들의 생일과 기념일들이 잘 보이도록 색 볼펜으로 메모를 해 둔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톨스토이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도 옮겨 적는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 나와 관계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며 따스하고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리라 꿈꾼다.

산자락엔 아직도 흰 눈이 가득하다. 눈 덮인 산등성이들은 굴곡이 선명하게 살아나며 꿈틀꿈틀 생동감이 느껴진다. 짱짱한 바람 속에 흐르는 그 생명의 힘이 구제역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경색된 남북관계로 상처받은 우리 모두에게 희망으로 스며들어 모두가 뜨겁게 사랑하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막 문을 연 신묘년이 누구에게나 행복하게 머물다 가는 아름다운 정거장이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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