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자락에서
한 해의 끝자락에서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12.29 21: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쏟아 붓는 눈발을 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학원 가방을 둘러매는 녀석들에게 "야! 오늘은 학원 가지 말고 아빠하고 산책하러 가자! 눈싸움도 하고" 신이 난 녀석들은 장갑을 찾는다고 부산을 떨며 하염없이 내려 쌓인 눈밭을 뒹굴 생각에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좁은 오솔길, 나뭇가지에 소담스럽게 핀 눈꽃을 보며 연방 눈을 뭉쳐 허공에 던진다. 내린 눈이 녹아 빙판이 되어 거북이걸음으로 운전해야 하는 어른들의 고민은 안중에도 없다. 마른 나무들 사이로 바람에 잘게 부서진 눈가루가 안개처럼 자욱이 피어오른다.

언제나 그렇듯 십이월 끝자락에 삶이 몰리면 심란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이상으로 황량한 감정에 사로잡혀 무언가를 놓치고 산 공허함에 두 손은 늘 허전하다. 오늘처럼 눈이 내리고 한 해를 마무리 짓는 말들이 쏟아지는 이쯤에 퀭한 바람에도 몸을 움츠리는 이는 나뿐이 아닐 것이다.

며칠 전 가족들과 청주박물관에서 '염쟁이 유씨'라는 연극을 관람했다. 평생 송장을 씻기고 수의를 입혀 저승길로 보내는 염장이의 삶이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진행된다. 중간 중간 관객을 불러 진행의 활력을 불어넣고, 관객의 어설픈 몸짓을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 간혹가다 나오는 맛깔스러운 욕설에 어린 관객들은 재미있다고 손뼉을 친다. 지긋한 연배의 노인들이야 한두 번은 직접 보았을 낯익은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다. 강당이 꽉 차 보조 의자를 놓을 정도로 만원이다.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연령이 다양하다. 염이라는 낯선 소재를 설명하는 부모의 입은 바쁘기만 하다.

사십 년을 해 온 염습을 그만두는 날, 마지막 주인공을 자기 아들로 설정해 비장감을 더했다. 염습의 전 과정이 끝나고 공연도 막을 내렸다. 살아 있으므로 죽은 이에 대한 강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구별은 없다. 죽은 자도 산 자처럼 생각해 극진함을 다했다. 입 안에 불린 쌀을 넣고 노잣돈을 넣어 주는 것은 산 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안내자 역할을 하는 저승사자를 대접하는 것도 동행 길의 안부를 염려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죽음을 통해 살아 있음을 얘기한다. 염습은 다른 이의 모습을 빌려 내 모습을 보는 것이다. 슬프다고 하면 슬플 일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가고 옴의 경계가 몸을 땅에 묻는 것으로 나눌 수 없는 이유이다. 죽음으로 말을 하고 누구도 본 적 없는 저승사자를 빌려 삶을 얘기하는 것은 죽은 이가 산 이에게 보내는 또 다른 말이다.

퍼붓는 눈도 그치고, 사랑도 멈출 때가 있고 우리의 삶도 내려놓을 때가 있다. 돌아보면 평범한 일상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눌 수 없는 시간을 구분 지어 삶을 반추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간특한 생각이다. 그럼에도, 시간을 매듭지어 시작과 끝의 분기점으로 삼는 것은 좀 더 나은 삶을 기대하는 까닭이다. 후회와 희망은 신기루 같은 것이다. 자잘하게 부서진 시, 분의 삶이 현재의 모습이다. 오늘 하지 못한 일을 내일은 할 수 있다는 욕심은 허황된 믿음이다.

업적을 만들기 위해 윙윙거리는 기계음과 적의를 드러낸 포성이 한 해의 얼룩처럼 남았다. 눈으로 덮을 수 있는 상처라면 좋겠다. 세월이 지문처럼 남은 몸은 과거를 기억한다. 염장이 손에 맡긴 작은 육신 위에도 눈이 소복이 쌓여 행복했으면 좋겠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손바닥을 펴 실개천처럼 퍼져 나간 손금을 따라 내 삶을 보았으면 좋겠다. 놓는 것에 야박하지 않은, 부드럽게 감싸는 것에 인색하지 않은 우리네였음은 좋겠다. 움켜진 주먹보다 보자기의 넉넉함에 감동하는 한 해였음은 좋겠다. 돌아오는 길, 감자탕 사 들고 와 죽은 돼지의 살점과 골수를 빼먹으며 죽음을 부활시킨다. 눈 내리는 세모(歲暮), 살아 있음에 가만히 그대의 얼굴을 더듬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