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공장과 옥장-②
은공장과 옥장-②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12.21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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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윤병화 <세경대학 박물관큐레이터과 교수>

우리나라는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금, 은, 동, 철 등의 금속을 사용하여 다양한 물품을 제작하였는데, 이는 금속이 단단하고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고 쉽게 변하지 않는 특성 때문이었다. 그 외 옥석류, 보패류, 견류 등의 재료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재료를 이용하여 각종 장신구와 일상용구 등을 만들던 공장(工匠 장인)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 수공업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공장의 체계는 조선시대 말기로 접어들면서 왕권의 약화와 맞물려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08년 조선 공예미술의 명맥을 잇자는 취지로 일본인이 투자하고 왕실이 운영하던 한성미술품제작소가 건립되어 1937년 폐쇄될 때까지 나전칠기, 목공, 제묵, 주금, 단금, 보석, 조각, 입사, 도자, 두석, 염직 등 11개 분야의 공장이 유지되어 왔다. 일제강점기가 지나고 현대화를 겪으면서 생활방식이 변화되고 공장이 제작하던 기물들에 대한 수요가 줄어드는 과정에서 그 맥이 끊어진 분야도 상당하다.

다행스럽게도 정부와 시·도 단체에서는 민족의식을 표현하는 유산으로 무형의 문화적 소산인 공장의 기술을 발굴·지정, 보존·전승, 보급하는 활동을 진행하여 다양한 공예기술을 무형문화재로 보유하고 있다.

특히, 장신구를 만드는 무형문화재는 일상용구가 아닌 지배층의 상징물을 맞춤형으로 만드는 인물이었던 만큼 다양한 분야로 존재하였고, 지금은 입사장, 은공장, 금은장, 옥장 등이 전통 장신구의 명맥을 잇고 있다.

이 중 가장 최근에 공장으로 지정받은 금속가공의 서울시무형문화재 제17호 이정훈 선생과 옥가공의 서울시무형문화재 제37호 엄익평 선생을 중심으로 장신구 무형문화재를 살펴보고자 한다.

은공장이 사용하는 은은 청백색으로, 녹슬거나 변색이 적고 전성(展性)과 연성(延性)이 좋기 때문에 비녀, 뒤꽂이, 첩지 등의 장신구류와 은수저, 은대접 등의 일상용구류 등을 만들었다.

은공장은 과거 은장을 뜻하며, 최초의 은장은 520년 백제 무령왕릉의 은제팔찌를 만든 다리(多利)이며 이후 시대별로 몸을 장식하는 패물과 음식을 담는 기물 등을 만드는 장인으로 현재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다.

이 중 은공장 이정훈 선생은 1935년생으로 1948년 서울 '동광양행'의 귀금속 기능사로 금속공예에 입문하여 우리나라 조각세공 1세대로 자리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동광양행'이 문을 닫자 대전의 '미술당'으로 가서 금·은 세공을 더욱 다양하게 섭렵한 후 1956년 서울로 돌아와 명동에서 '태광사'를 설립하여 정밀세공 작업을 지속하고 있으며 현재에는 '태광공방'을 운영하며 새로운 디자인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이렇게 58년 동안 세공업에 종사하면서 한국귀금속공예협회 초대회장, (재)한국귀금속 보석기술협회 전무이사, 전국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 지방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 명장선정심사위원 등을 역임하는가 하면 2003년에는 대한민국 세공조각 기능전승자로 지정되었고, 2006년에는 세공조각분야 대한명인으로 추대되었으며2008년에는 서울시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01년 청주국제공예비앤날레 은상, 2003년 무주전통공예전 특선 수상, 2009년 서울시 전통예술인상 수상 등 75세가 넘어서도 지속적으로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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