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공주에서 부강으로 ①
<8> 공주에서 부강으로 ①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8.26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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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의 소금길을 찾아서
① 금강변에 복원된 선사인들의 막집. 금강이 선사 이래의 오래된 젖줄임을 느낄 수 있다.

역사 이전부터 소금 유통 … 한반도의 젖줄

서해 연안 전통염전 갈수록 사양길

선사인도 금강통해 소금 조달한 듯

◇ 안면도 장곡염전을 가다

공주에서 부강으로 향하기 전 안면도를 찾았다. 안면도는 강경포구에 소금을 공급해 주던 생산지 중의 한 곳이다. 강경포구가 성시를 이루던 시기엔 주로 나주산 소금이 들어온 까닭에 안면도 소금은 비록 유입량은 적었지만 강경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공급처란 점에서 나름대로 중요성을 띠고 있다. 더욱이 금강의 소금길이 시작되는 첫 출발점이 사실상 서해연안의 염전이란 점을 고려하면 과거 여러 개의 염전이 있던 안면도는 그 중요성이 더 하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안면도 역시 소금 생산지로서의 기능은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다. 장곡·태안·두산염전 등 불과 서너 곳만이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안면도 남서단의 장곡염전을 찾아갔다. 폭우가 걷힌 뒤 가마솥처럼 끓어오르는 폭염 아래 도착한 안면도. 똘똘하다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만 믿고 꾸불꾸불한 길을 정신없이 따라갔더니만, 웬걸 염전은커녕 바다와 동떨어진 어느 마을의 한가운데였다. 그 흔한 이정표도 없었다. 해서 묻고 또 물어 겨우 찾아간 장곡염전. 그러나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타일을 깐 소금밭엔 언제 가둬 놓은 바닷물인지 내리쬐는 뙤약볕에 소금꽃을 피우느라 농도 짙은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다란 고무래로 소금을 모으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염전 모습만 염두에 두고 찾아간 수백리길. 실망하며 되돌아 서려는데 다행히도 소금창고 구석에 적힌 전화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반가움에 전화를 거니 건너편 창고서 금세 사람이 나왔다. 자루에 소금 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단다.

"요즘처럼 비가 잦은 시기엔 염전을 비우면 큰일 납니다. 빗방울 하나라도 들어가면 그동안 말려놓은 물이 몽땅 허사가 됩니다." 50년 이상 소금을 만들어 왔다는 이상원씨(69)가 하늘을 바라보며 소금 만드는 일엔 날씨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을 건넸다.

"일기예보를 들으니 밤에 비가 온다고 해서 소금밭의 물들을 다시 창고로 끌어넣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창고 지붕에 얹혀있던 고무래를 들고 물을 끌어넣기 시작하던 이씨는 "날씨에 따라 물을 끌어내고 집어넣는 일을 수시로 하다 보니 힘들어서 버텨내는 사람이 없다"며 극심한 인력난을 걱정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염전이 있었으니까 아마 안면도에서는 가장 오래됐을 겁니다. 예전에는 소금배가 자주 들어왔는데 그중에는 강경에서 온 배도 있었다고 합니다."

부친으로부터 강경의 소금배 이야기를 들었다는 이씨는 소금 만드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할 정도로 중노동인 데다 최근 들어서는 중국산 등 수입 소금의 유통으로 인해 국내 제염업계가 사양길을 걷고 있다며 머지않아 안면도에서도 전통방식의 염전이 사라질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②·③ 공주 석장리박물관이 복원한 금강 선사인들의 식생활 모습. 오랜 옛날 금강의 선사인들은 그들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금을 금강을 통해 조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금강의 구석기인과 소금

금강변에는 이름난 선사문화 유적지가 두 곳 있다. 하나는 공주 석장리 유적이고 다른 하나는 대청호 주변의 청원 두루봉동굴 유적이다. 공주 석장리 유적에서는 남한 최초의 구석기 문화층과 함께 중석기 문화층이 발견됐는데, 이들 문화층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머리털과 집터, 살림터 등이 발굴된 바 있다. 또한 청원 두루봉동굴 유적에서는 흔히 '한반도의 첫 사람'이라 불리는 사람뼈(복원돼 흥수아이로 명명)가 발굴됨으로써 금강변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어떤 식생활을 했을까. 공교롭게도 이에 대한 궁금증은 석장리박물관을 답사하면서 더욱 커져 생뚱맞게도 선사인과 소금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현재 석장리박물관 내 제3전시실에는 당시 선사인들의 생활을 디오라마로 제작, 전시해 놨다.<사진> 디오라마에 의하면 당시 선사인들은 동굴이나 바위그늘을 집 삼아 생활하거나 노천에 막집을 짓고 살았으며 식생활은 곰, 멧돼지, 큰사슴 등을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아 먹었고 도토리와 풀뿌리 같은 것도 채집해 먹었다.

그런데 이 디오라마에는 소금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소금관련 유물이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해서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과연 석장리 구석기인들은 소금을 먹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더구나 고기를 먹을 때에도 소금을 치지 않고 그냥 먹었을까.

물론 그냥 먹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선사인들이나 현대인들이나 소금 없이는 생명유지가 힘들다는 생리적 공통점을 생각할 때 어떤 형태로든 최소한의 소금을 섭취했을 가능성이 크다. 인체에 소금 성분이 없으면 세포자체가 제대로 기능을 못하고 위액인 위염산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지금의 현대인 유전인자나 수만 년 전 사람의 유전인자나 거의 차이가 없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즉, 현대인의 인체 적응구조는 이미 석기시대에 갖춰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또 한 가지 의미있는 조형물이 전남 신안 증도의 소금박물관에 설치돼 있다. 이 박물관 입구의 매머드 조형물이 바로 그것으로, 이의 설치목적이 구석기인과 소금과의 관계를 암시해 주고 있다. 즉, 구석기인들은 매머드를 최고의 사냥감으로 여겨 사냥 할 때마다 매머드를 따라 이동했는데 그 길이 곧 '매머드 스텝'이요, 매머드가 소금을 찾아 이동했다고 해서 '소금길'로도 불렀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다른 측면에서 추론해 보면 구석기인들은 매머드 사냥을 통해 고기는 물론 소금까지 얻었으며 그 과정에서 소금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강은 예나 지금이나 서해로 통하는 관문이자 서해 소금의 주요 유통로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 이 지역의 구석기인들도 어떤 방식으로든 금강을 통해 서해를 드나들며 생명유지에 필요한 소금을 구했을 것이다. 금강은 그만큼 오래된 젖줄이다.

석장리박물관의 실내전시관을 나와 다시 금강으로 향하려는데 강변 둔치에 복원된 선사인들의 막집이 발길을 잡아 끌었다. 지금이야 잔디광장에 몇몇 막집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지만 머지않아 선사시대의 동물상과 식물상을 복원해 선사시대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란다.

그때를 기대하며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공주 공산성을 올랐다.

④'강경의 소금배 이야기'를 들려준 장곡염전의 이상원씨. 그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소금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김성식 전문(프리랜서)기자/ 임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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