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월드컵 4강 신화 주역 지소연의 恨
여자 월드컵 4강 신화 주역 지소연의 恨
  • 이재경 기자
  • 승인 2010.07.26 2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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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이재경 부국장 (천안)

어제 새벽, 독일에서 사상 첫 여자 청소년 월드컵(U-20) 4강 진출의 신화를 창조한 한국 대표팀에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골든 제너레이션(Golden Generation, 황금 세대) 도래', '진흙 속에 핀 꽃' 등 언론 헤드라인의 수사도 화려하다.

경기 내용을 보면 칭찬 받을 만도 하다. 4강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팬들이 가슴을 졸이게 하지 않았다. 스위스와의 서전을 4대0 승으로 장식한 뒤, 가나를 4대2로 완파, 일찌감치 8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8강전에서 맞붙은 멕시코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선수들은 그야말로 게임을 즐겼다. 상대 골문 오른쪽에서 수비수 넷을 앞에 두고 여유 있게 차 넣은 이현영의 슛이 그대로 왼쪽 골포스트 안으로 들어갔고, 이어 터진 지소연의 절묘한 프리킥 골. 후반에 추가된 이현영의 쐐기골은 침착함과 자신감의 결과였다. 멕시코가 발버둥쳤지만 결국은 우리의 3대1 승. 한 번도 이런 축구를 본 적이 없던 팬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린 월드컵 때 항상 조별 리그에서 경우의 수를 따지고 매 경기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봐야 했다.)

우리 태극낭자들이 박수받을 충분한 이유는 또 있다.

이 쾌거가 척박한 토양에서 이뤄냈다는 점이다. 우선 외신들이 놀라고 있다. 한국 여자축구의 저변 환경을 알고 난 외신들은 '기적의 4강'이라며 치켜세웠다. 선수층만 봐도 놀랄만하다. 독일의 언론은 우리나라의 여자 축구선수 숫자가 1404명인 것에 주목했다. 독일 축구협회에 등록된 여자 선수는 모두 105만명. 우리 선수층은 수치만 비교하면 독일에 비해 0.004% 밖에 안된다. 그런 나라가 4강에 진출했다니 기적이라 하지 않겠는가. 속을 들여다보면 한심스러운 수준이다. 중등부 선수들이 17개교 391명, 고등부는 16개교 339명, 대학부는 6개교에 158명이 고작이다. 나이가 먹을수록 선수층이 더 엷어진다. 실업팀도 7개교에 불과하다. 이러니 4강에서 맞붙는 독일과의 대결은 다윗과 골리앗이 아니라 개미와 골리앗이 싸우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일진데 국내에서 받는 대우도 영 찬밥신세다. 국민 대다수는 여자실업리그(WK-리그, 2009년 창설)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긴 TV 중계도 않으니. 선수들의 장래도 기약 없다. 국가대표가 되어야 그나마 명예라도 얻지, 대부분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고 실업팀에서 뛰다가 나이 차서 시집이나 잘 가면 다행이다.

이번 청소년 월드컵에서 6골을 몰아넣으며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는 지소연(19·한양여대)이 출전을 앞두고 이런 말을 했다. "한을 다 풀고 오겠다." 우리나라가 아시아 예선에서 탈락, 내년 성인 여자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하는 아픔을 염두에 둔 말이었지만 이어진 인터뷰를 새겨보면 진짜 한은 따로 있었다.

"남자에 비해 인기가 없다 보니 우리 경기는 (방송사가) 생중계가 아닌 녹화로 보여준다. 비인기 종목이라는 설움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이번 대회가 너무 중요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자 청소년 월드컵은 중계권을 갖고 있는 SBS조차 현지에 취재기자는커녕 방송팀조차 파견하지 않았다. 중계도 8강전에서야 지상파로 했다.

다른 방송들은 더 기가 막혔다. 어제 아침, 24시간 뉴스 채널은 오전 9시 이전까지 태극낭자들의 낭보를 전하지 않았다. 자막 뉴스에서조차 여자 축구 4강 진출은 최경주의 유러피언 투어 13위 소식에 밀렸다. 방송조차 이렇게 천대하는 척박한 환경이니 지소연의 '한'이 얼마나 컸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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