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잠 못드는 '민간인 희생자'
죽어서도 잠 못드는 '민간인 희생자'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0.06.24 21: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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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336구 수습 충북대 추모관에 임시 안치
충북대학교 유해발굴 단원들이 2007년 8월 청원군 남일면 고은3리 분터골에서 한국전쟁을 전후해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3년이 지난 지금, 현장에는 안내문 하나만 달랑 남은채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 전쟁의 상흔을 덮고 있다.
'좌익세력' 관심 시들 … 발굴현장 잡초만 무성

학계 "60년 세월 … 위령탑 세워 영혼 달래야"

2007년 7월, 조용하던 농촌마을 청원군 분터골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6.25당시 학살된 민간인 유해가 매장되었다는 제보 속에 박선주 충북대 교수를 단장으로 유해발굴 작업에 첫 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청원 분터골은 민간인 집단희생지란 점에서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전쟁이 끝나고 60여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념 대립이 잔존한 상황에서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사회적 이슈를 제공했다.

2007년 유해발굴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청원 분터골에는 밭을 갈다 나온 뼈들이 밭가장자리에 수북히 쌓여 뼈무덤을 이루고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좌익세력 처단이라는 국가적 논리는 민간인 집단 희생자들을 우리 모두가 외면하게 만든 셈이다.

'보도연맹원 처형'이라는 미명 아래 청원 분터골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은 1950년 7월 4일부터 11일 사이에 벌어졌다. 당시 청주경찰서와 청주형무소 등지에 소집·구금되었던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들이 고은 3구 매방골 안쪽 계곡에서 집단 희생이 이뤄졌고, 분터골과 인근 지경골, 여우골 등지에 매장됐다.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서 서로가 총을 겨눴던, 누구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참혹한 전쟁의 상흔은 한국전쟁 발발 57년만에 청원 분터골 역사의 현장에서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산비탈에 일열로 매장된 유해와 이겹 삼겹으로 쌓인 유해들은 서로가 엉켜 있었다. 유해들은 무릎이 굽혀지고 손목이 묶인 채 일렬로 집단 매장된 상태로 발굴돼 당시의 상황을 가늠하게 했다.

그런가 하면 누가 신었던 신발이었는지 삭은 신발들이 뼈 사이에 덩그마니 남아 있고, 머리빗과 허리띠, 하얀 여자고무신만이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사그러져간 이름모를 누군가를 생각하게 했다.

어쩌면 이 잔해들은 스스로 역사의 증거가 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는지도 모른다. 처참한 전쟁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증거로 말이다.

2007년과 2008년 두 차례 실시한 청원 분터골 민간인 유해발굴작업은 모두 336구의 유해와 539점의 유품을 수습했다. 유골들은 현재 충북대학교 내에 조성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관'에 임시로 안치돼 있다.

죽어서도 갈 곳 없는 이들의 현주소를 보면서 우리 안에 아물지 않은 상처의 깊이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유골에 무슨 이념이 있겠는가. 이제 이념 논쟁을 떠나 안타깝게 희생된 자들의 유골을 찾아내 무심히 흘려보냈던 60년 세월의 자리에 위령탑이라도 세워 그들의 영혼을 달래줘야 하지 않을까.

유해발굴 3년이 지난 2010년 6월 24일, 청원 분터골을 다시 찾았다. 전형적인 농촌인 분터골에는 처참한 전쟁의 상흔을 덮어주려는 듯 개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사람들의 관심마저 사라진 유해발굴 현장에는 철제 안내판 하나만이 덜렁 세워져 전쟁의 아픔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터골 사건으로 남편을 잃고 평생 홀로 산 할머니가 매일 현장에 나와 시신을 확인하던 그 얼굴을 잊을 수 없다는 박선주 단장(충북대 교수)의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울렸다.

※ 정부는 한국전쟁에 대한 용어를 '6·25전쟁'으로 통일해 사용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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