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불견(君不見)
군불견(君不見)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6.21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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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강대헌 <충북인터넷고 교사>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흘러서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그대는 보지 못하는가/높다란 마루에서 거울을 보고 백발을 슬퍼하는 것을/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가 저녁에 눈처럼 된 것을." 청련거사(靑蓮居士) 이백(李白, 701~762)의 '장진주(將進酒)'라는 고시(古詩)에 나오는 내용이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무엇을 보고, 또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나는 꼼짝달싹 못하고 화석(化石)처럼 되고 만다.

퍼뜩,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금부터 2,400년 전쯤에 소크라테스가 최고의 문명 도시 아테네 거리에서 외쳤던 말이 연상된다. 그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 즉 "당신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철학자 이정우는 그의 책 '영혼론 입문'에서 소크라테스가 한 그 말은 곧 "그대가 미천한 존재가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다"라는 뜻으로서 이성적 인식을 할 수 있고,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심미적 기쁨에 젖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며, 인간은 사유를 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고, 아름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참으로 위대한 존재인데, 그리고 인생이란 단 한 번밖에 없는 것인데, 왜 그대의 인생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가라는 뜻이라고 언급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소크라테스의 말이 그렇잖아도 자격지심(自激之心)이 많았던 당대의 현학자(衒學者)들에게는 "네가 사람이면 그럴 순 없다. 그러니까 너는 견자(犬者)다"라는 식으로 곡해(曲解)되어 결국은 소크라테스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들은 볼 것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봐서 일을 그르치고 만 셈이라고나 할까.

시성(詩聖) 두보(杜甫, 712~770)가 지은 '등고(登高)'를 보자. '바람이 빠르며 하늘이 높고 원숭이의 휘파람이 슬프니/물가가 맑고 모래 흰 곳에 새가 돌아오는구나/끝없이 지는 나뭇잎은 쓸쓸히 떨어지고/다함이 없는 긴 강은 잇달아 흘러오는구나/만리(萬里)에 가을을 슬퍼하여 늘 나그네가 되니/한 평생 많은 병에 시달리다 혼자 누대에 오른다/온갖 고통에 서리 같은 귀밑머리가 많음을 슬퍼하니/늙고 초췌함이 흐린 술잔을 새로 멈추었노라.'

두보의 '등고'는 이백의 '장진주'와 마주 놓고 보면 마치 건배제의(乾杯提議)에 대한 화답(和答)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보가 이백의 비단옷 위에 꽃을 더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백과 두보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의기투합(意氣投合)하고 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의 진리는 언제나 우리들의 오만한 가슴속을 헤집고 들어와 무장해제(武裝解除)를 명령한다.

30년 이상을 외길로 연기를 파고들어 지금은 명품 조연이라는 말까지 듣고 있는 연극배우 김병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항상 꿈꾸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국내외 시상식에서 연기대상도 받고 연극무대에선 제 이름을 걸고 관객을 끌어들이는 그런 배우요. 아직도 깨우쳐야 할 점들이 밤하늘에 뜬 별처럼 수두룩해요. 결코 욕심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에요. 전 지금 연기에 목숨 걸었거든요." 우리들은 그의 말에서 무엇을 보아야만 하는가.

우리들은 모든 일에서 '견자(見者)', 즉 '보는 사람'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군불견(君不見),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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