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 금지
좌절 금지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2.21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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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강대헌 <충북 인터넷고 교사>
조각가 권진규(1922~1973)는 요절(夭折)했다. 그가 1967년에 만든 테라코타 작품 '지원의 얼굴'을 사진으로 보았다. 한국적(韓國的)이지만, 뭔가 모를 이국적(異國的)인 질감을 느꼈다. 아하,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시대를 앞서 간 그가 한편으론 측은해서 견딜 수 없었다.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 싶다.", "범인(凡人)엔 침을, 바보엔 존경을, 천재엔 감사를", "지금의 조각은 외국 작품의 모방을 하게 되어 사실(寫實)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불쌍합니다".

그가 남긴 말들은 여전히 고갱이가 살아 있다. 그런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안타깝고 애석하다. '인생은 공(空), 파멸'물론, 인생을 공으로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공을 파멸로 보았다. 그래서 스스로 죽고 말았다. 아니, 아니다. 공(空)은 오히려 하나의 지향점(指向點)이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인테리어의 핵심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다."

브람스가 작곡한 '독일 레퀴엠(Ein Deutches Requiem, Op. 45)'은 다른 음악가들의 레퀴엠과는 구분될 정도로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곡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레퀴엠 앞에 특별히 '인간적인'이란 말을 붙이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의 뜻대로라면 '인간적인 레퀴엠'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을 텐데. 죽음을 애도(哀悼)할 때 아무리 슬픔이 복받칠지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죽음은 인간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레퀴엠 중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는 마치 자장가처럼 편안하게 들린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마지막 모습일 뿐이다. 늦게나마 권진규의 죽음을 애도한다.

신(神)은 한쪽 문을 닫을 때, 다른 창문을 열어 놓는다고 한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캄캄한 독방(獨房)에 갇혀 있게 되면, 미쳐버리고 마는 존재이니까. 게다가 조그만 틈새도 없이 꽉 막힌 캄캄한 공간에 홀로 버려지게 되면, 올드 보이처럼 머리털이 오그라들고 이가 빠지고 정신은 착란(錯亂)하게 되는 그런 가련한 생물이니까. 신은 어떤 방법으로든 관용의 끈을 놓지 않는다. 내가 불편하다고 신을 저주하기에 앞서 나를 위해 열려진 창문을 찾아보자.

거울을 보다가, 문득 내가 내게 말한다. "괜히 폼만 잡다가 망가진 쓰레기, 우주의 빵꾸똥꾸야!"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트집거리로 거울만 깨버릴 수는 없는 일이고. 언젠가는 내가 나를 이렇게 글로 옮긴 적도 있다.

때가 되니/배가 고파/빵을 먹었다./허겁지겁./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강한 느낌이 들었다./그래,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거구나./눈물이 핑~ 돌았다./배는 채웠는데, 다음엔 무엇을 할 것인가/삶은 미지수(未知數)다./쉽지 않은.

"산궁수진(山窮水盡) 의무로(疑無路) 유암화명(柳暗花明) 우일촌(又一村)" 산이 막히고 물이 말라서 길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버드나무숲 우거지고 꽃이 만발한 마을이 또 나타나더라. 소동파(蘇東坡)의 멋진 시구(詩句)가 눈에 찬다. 일본의 중저가 일상복 브랜드로 유명한 유니클로(UNIQLO)의 도발적인 사명(使命) 선언도 눈에 찬다. "옷을 바꾸고, 상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사는 게 재미없다고 좌절만 할 것인가. 쇼팽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내 작품은 만들어진 고뇌(苦惱)다." 이래저래 되는 일이 없다고 무릎을 꿇은 채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거기서 그만, 좌절 금지(No Frustration)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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