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전, 우리는 이런 걸 배웠다
22년전, 우리는 이런 걸 배웠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11.30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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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한덕현 <본보 편집인>
1987년 4월 13일 오전, 이 시각 전 국민의 시선은 TV 수상기에 맞춰졌다. 근엄한 표정으로 화면에 등장한 전두환 대통령은 예의 굵직하고도 무게있는 목소리로 "본인은~"으로 시작되는 말을 이어갔다. 이른바 4. 13호헌조치가 발표되던 날이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헌법을 개정하자는 국민적 여론을 봉쇄하기 위해 대국민 발표라는 마지막 카드를 빼들었고 이날 방송을 기점으로 헌법개정논의는 원천적으로 금지됐다. 장충체육관에 친정부 인사들을 집합시켜 놓고 이들에게 대통령 선출을 맡길 게 아니라 국민들의 직접 선거로 뽑자는, 지금 생각해 보면 민주주의의 당연한 원리를 이런 식으로 잠재우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개헌을 향한 국민들의 저항은 오히려 더 거세졌고, 급기야 경찰의 최루탄에 이한열이 쓰러지면서 6. 10 항쟁이라는 요원의 불길만을 촉발시키게 된다.

물론, 과거 독재나 권위주의 시절엔 대통령의 대국민발표나 담화가 막강한(?) 약발을 발휘했다. 최고 통치권자의 말 한마디가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시절엔 당연했던 현상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만능 해결사가 된다는 것은 한 가지 대단히 위험한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나중에는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 스스로도 그렇고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일이 잘못 꼬일 경우 대통령에겐 더 이상의 배수진이 없어지게 되고 국민들에겐 마지막 보루의 상실을 가져오게 된다.

청와대나 대통령이 국가적 아젠다를 주도할 경우 당장의 효율성은 누릴 수 있겠지만, 그 이면엔 바로 이런 맹점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생방송으로 공언한 호헌조치가 역으로 넥타이 부대까지 거리로 유혹하며 더 심각한 국민적 저항을 초래한 것은 다름아닌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이른바 '마지막 보루의 상실'에 따른 극단적 표출이 동시에 폭발했기 때문이다.

지난 27일 '대통령과의 대화'를 기점으로 정부와 여당은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국민여론이 호전됐다고 장담하고 있지만 야당과 충청권의 반발은 되레 기름에 불을 댕긴 꼴이다. 그동안 원안과 수정 사이에서 어렵게 줄타기를 하던 여당의 일부 관계자들마저 일거에 MB논리에 줄을 서는 바람에 세종시에 대해선 더 이상 중간지대가 없다. 세종시 문제도 이젠 너 아니면 나밖에 없는 것이다. 대통령의 등장은 이렇듯 숨을 곳, 출구를 좁히게 되고 그럼으로써 앞으로의 충돌지수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지금 많은 사람들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

앞으로 예상되는 장면은 이미 본란을 통해 지적했듯이 조만간 정부가 발표할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충청권 내부의 아귀다툼이다. 지금처럼 충청권이 한목소리를 낸다면 세종시 수정안은 설 자리를 잃게 되지만 만약 그 세력이 얼마가 될지언정 찬성여론이라도 일게 되면 수정안은 다시 결정적 동력을 얻게 된다.

지금까지의 세종시 공방을 명분과 실리의 충돌로 정리하면 답은 의외로 쉽게 나온다. 명분은 수도권 과밀해소와 국가균형발전이고, 실리는 국가분할과 유령도시화를 막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실질적인 자족도시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과 실리의 맹목적 충돌은 조선시대의 당파싸움에서도 드러났듯 나라를 거덜낼 뿐이다. 지난 역사를 통해 우리가 얻은 교훈은 아무리 좋은 명분도 실리를 잃으면 나라를 좀먹게 한다는 것이고, 반대로 아무리 좋은 실리라도 명분을 잃게 되면 생명력이 짧다는 것이다. 때문에 생겨난 것이 실리를 추구하려면 철저히 명분부터 확인하여 대응하라는 선인들의 통찰력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의 형국은 명분과 실리 모든 것을 잃었다. 국민과 치열하게 약속된 국가적 대업이 느닷없이 번복되는가 하면, 그것도 부족해 충청인을 욕보이는 일에 충청인이 앞잡이가 되고 있는 현실은 무슨 명분이고 실리이고를 생각하기 전에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모멸감만을 한없이 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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