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겨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7.14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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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반숭례 <수필가>
   석화리 넓은 들판엔 땅심 받은 모 싹들이 짙푸른 초록 물감을 풀었다. 날로 날로 모 싹들이 부쩍부쩍 자라나는 들판을 보면 이른 봄날 옆집 친구 광순이네 못자리 하던 날 차가운 바람을 등에 지고 한몫을 했다는 자부심이 뿌듯하다.

석화리에 와서 사는 지 십년 하고도 삼 년째 접어들었다. 광순이 쫓아다니다 보니 부녀 회원도 되고 반장할 사람이 부족하다 하여 옆집 아저씨 추천까지 받아 반장까지 되었다. 반장이 되던 날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나는 자축 하는 의미의 웃음을 웃었다. 처음 이 동네에 이사 와서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과 서러움을 받았다. 그 서러움을 그동안 광순이네 가족들이 나를 대변해 주고 위로해 주었기에 참고 견디어 온 끈기가 오늘 동네 주민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 참으로 기특하고 대견스러웠던 것이다.

유년시절 나는 농사꾼의 아내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논밭을 오고 가시는 아버지 발길 따라 다니다가 '아버지 닮은 남편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농부의 아내는 못 되었지만 농사철만 되면 광순이가 남편 오토바이 뒤에 타고 논과 밭으로 달리고 경운기 타고 동네를 가로지르면 내심 부러웠다, 그런데 눈치 빠른 아저씨가 경운기와 오토바이 뒤에 나까지 나란히 태워 주어서 남모르는 행복을 만끽하며 살고 있어 간접적이나마 소원 한 가지는 이룬 셈이다.

광순이는 천성이 착하다. 묵묵히 농사일을 즐기면서까지 힘든 줄도 모르게 하는 그녀를 보면 행복한 사람은 특별한 환경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마음자세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또 우리가 다 같은 성격의 사람이 아닌 이상 희망하는 행복은 똑같을 리 없지만 구비조건을 갖추지 않았어도 동기를 부여한 행복은 내 마음이 만드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광순이네 못자리 하는 날이다. 일을 거들어 준답시고 쫓아갔다. 어우리로 하기에, 모인 동네 사람들의 농담이 오고가는 시끌벅적한 웃음 속에 춥고 힘든 줄도 모르지만 봄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이른 아침부터 바람이 불었으면 다음기회로 날을 잡아서 일을 하는 것인데 못자리 하다 어중간할 때 바람이 불어오니 난감한 아저씨들의 손길은 더욱 바빠졌다. 서쪽 하늘에서는 비구름이 몰려오듯 잿빛 하늘이 미호천을 향해 내려온다. 이제 막바지로 모씨가 담긴 모판을 무논에 가지런히 넣고 비닐을 씌우는 작업만 남았다. 그런데 강한 바람 때문에 여자들이 들어가지 않으려 서로 눈치만 보았다. 무논에서는 아저씨들이 미스코리아 대회 끝났으니 빨리 들어와서 비닐을 잡아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소리를 질러댔다. 뽀얀 흙먼지를 뒤집어 쓴 동네 아낙들. 흙탕물로 연지곤지까지 얼굴에 바르고 논가에 일렬로 서 있는 폼새들이 가관이 아니다.

광순이가 장딴지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는다. 친구 따라 나도 긴 장화를 장딴지까지 올리고 질퍽한 무논에 발을 담갔다. 그냥 푹 들어가며 빠져 한 발자국도 옮길 수가 없다.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쁜 일손에 나를 꺼내 달라지는 못하고 이리저리 빠져 나갈 궁리를 해도 되지 않았다. 그때 광순이가 첨벙 첨벙 개구리 뒷다리 올리듯 다가와 내 허리를 꽉 잡아 올린다. 힘도 장사인 우리 광순이가 나보고 이왕 들어왔으니 바람에 날리는 비닐을 잡고 맨 가장자리에 서 있으라고 한다. 꼼짝도 하지 않고 비닐을 꽉 잡았지만 중심 잃은 나는 그만 무논에 배 깔며 넘어지고 말았다. 바람은 나를 무논에 엎어놓고 비닐을 끌고 언덕 위에 올라가 휘파람을 분다. 무논에서 허우적거리는 내 꼴이 마냥 우스운 사람들,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 "농사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겨. 그대로 앉아 있어. 바람이 반 마담을 얕잡아 보잖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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