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로마 포럼과 황제들의 포럼
<180> 로마 포럼과 황제들의 포럼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6.15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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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덕의 오버 더 실크로드

정치·경제·문화 걸친 제국 구심점 역할

기원전 2세기쯤 확장… 신전·공회당·광장·상점 등 밀집

중세 이후 쇄락… 19세기 후반 발굴작업 거쳐 명맥 유지


로마 포럼이 있는 곳은 주변 언덕들이 마주치는 곳이어서 각 언덕에 사는 부락민들이 모이기 쉽고 주민의 경제 행위를 수용하는 데 적합하였다.

이곳은 원래 저지대였는데 기원전 600년경에 팔라티누스 언덕과 카피톨리누스 사이 늪지의 물을 빼고 하수시설을 확충하여 포장을 한 후에 도시생활의 구심점을 이루는 장소로 발전하였다.

도시 중심기능 수행… 각종 의식·행사 열려

그리스의 아고라(Agero)에 해당하는 로마 포럼은 도시의 중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정치, 경제, 사회, 위락, 교통 등의 제반 시설이 집중된 곳으로 대표적인 건축물이 세워지고 각종 의식과 행사가 열리던 곳이다. 로마인들이 건설한 도시의 중심에는 반드시 포럼 즉 공회장이 건설되었다.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것은 로마 포럼으로 카피톨리누스, 팔라티누스, 베르니날루스 세 언덕 사이에 있는 삼각 계곡에 위치하며 여러 황제가 완성한 포럼을 비롯하여 원로원, 왕궁, 신전, 개선문, 재판소, 상가 등 많은 건축물들이 집합해 있던 곳이다. 공화정 시대에 들어서 이곳에 공공건물과 신전이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시저 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2세기와 1세기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규모로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로마 포럼(공회장)은 신전과 바질리카(공회당), 기념비, 광장, 상가, 원로원, 시민회의 등이 밀집하여 있는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로마제국이 더욱 강대해지자 로마공회장 하나만으로는 불충분하여 시저 공회장을 효시로 아우구스투스 공회장, 트라야누스 공회장, 네르바 공회장 등이 로마 공회장 주변에 새로 세워졌다.

공회장과 인접한 두 언덕은 신들의 거처로 알려진 캄피톨리오 언덕과 로물루스가 거처를 정한 이후 황제와 명문귀족의 거처가 된 팔라틴 언덕이다. 로마의 언덕은 낮은 구릉이 서로 이어져 있어 고지대는 주거지로 저지대는 공공장소가 되었다. 저지대는 공회장과 대경기장이 세워지고 테베레강가에는 선착장과 시장이 생겨났다.

로마인들은 다신교도이므로 신들의 거처인 캄피톨리오만으로 부족하여 공회장에도 상당수의 신전이 들어섰다. 로마의 기후조건 때문에 상류층은 팔라틴 언덕을 비롯한 다섯 언덕에 모여 살고 서민들은 일곱 언덕 아래 집을 짓고 살았다.

서로마제국 멸망후 공회장 역사 뒤안길로

로마의 공화정 시대는 시저가 암살된 기원전 44년까지 지속되었다. 초기 제정시대는 285년에 후기 제정시대는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끝나고 이후 공회장은 역사에 묻히고 만다.

2세기 당시 로마 제국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명을 꽃 피운 땅이었다. 로마의 위대함은 정복의 속도나 영토의 넓이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점령지에 길을 내고 법과 질서에 의해 지배하고 도시를 아름답고 질서 있게 계획하였다.

로마 공회장은 서기 283년에 화재로 파괴된 후에 디오클라티아누스 황제 때 복구되었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친 야만족의 약탈로 이 공회장은 거의 폐허가 되었다.

중세 이후로는 성당과 요새, 별장 등을 짓는데 이 공회장의 유적을 헐어 건축자재로 사용하였는가 하면 양치기하는 곳으로 전락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들어 고고학적인 관심이 고조되면서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되어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시저 공회당, 3개의 원주만 덩그러니

트라야누스 황제 공회장을 뒤로하고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면 황제들의 공회장 중 최초의 건축인 기원전 46년 독재자에게 헌정된 청동상이 있는 시저의 공회장에 도착한다. 이곳은 높은 기초 위에 우뚝 선 제니트리채 배네레의 신전으로 지금은 세 개의 원주만이 덩그러니 남아 지나간 시대의 영광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 옛 공회장이 시민들을 수용하는 데 협소했던 당시 시저의 '파르사리아'전투를 기념해서 만든 회당이다. 시저의 시해 이후 기원전 29년 그가 화장되었던 자리에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시저의 신전은 신이 아닌 인간 숭배를 위한 최초의 신전으로 지금은 연단 전면에 약간의 바닥만 남아있다. 그리고 시저에 의해 세워진 쥴리아 대성전도 거의 대부분 파괴되었다. 인간으로 유일하게 신처럼 추앙과 숭배를 받았던 시저의 명성과 영광은 지하세계에서 발굴된 유적의 잔해들만이 그의 존재를 햇살 아래 드러내놓고 있다. 제국의 영광과 함성소리도 세월 앞엔 한낱 티끌처럼 바람에 흩어지는 존재이거늘 정복을 통해 이룩한 위대한 승리와 영광도 무수한 생명과 피와 맞바꾼 흙먼지에 지나지 않음을 저 유적들은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다.

건너편 아우구스투스 공회장에는 기원전 42년 아우구스투스가 '필리피'전투를 기념해 세운 '(복수의)마르스'신전자리에는 회당을 받치던 몇 개의 돌기둥만이 쓸쓸하게 서 있다.

중세기 때 제국의 공회장에는 '로디 기사들의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 공회당 다음 '콜론난스'라고 불리던 '미네르바 공회당'은 일하는 여성들이 우아하게 부조된 두 개의 석주가 남아있고 이것이 남아있는 미네르바 신전의 전부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폐허의 잔해는 베스파시아누스 공회당의 잔해들이다. 여기서 수도원 옆 공회장의 박물관을 방문할 수 있다. 또한 우측 정면으로 보이는 막센티우스 회당은 4세기의 건축으로 지금은 회당 본체에 세 개의 아치 부분만이 남아있다. 로마제국시대 마지막으로 세워진 대규모 건물인 이 공회당은 306년 막센티우스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황제 계승권을 둘러싸고 그를 패배시킨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짙은 녹음으로 덮인 무성한 나무들과 뼈대만 남은 텅 빈 공간에는 새소리와 매미소리만 정적을 깨고 있다. 인적이 끊긴 이 폐허 위에 새들만이 자유로이 날아다니고 있다. 흩어져 있는 주춧돌과 푸른 잔디밭과 잡초들이 우거진 틈새엔 풀벌레들과 곤충과 새들의 보금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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