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에는 검사가 있다
검찰에는 검사가 있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6.08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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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한덕현 <본보 편집인>
   아이러니컬하게도 최고 권력기관인 법원과 검찰이 똑같이 혹독한 여름을 맞게 됐다.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관여 논란으로 바람잘 날 없던 사법부가 결국 전국 법학교수로부터 신 대법관의 탄핵소추를 공개적으로 요구받는 지경에 이르렀고, 서거정국에 편승해 도마 위에 올려진 검찰은 '개혁'이라는 과제로 연일 여론과 언론의 타깃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느낌은 아주 명쾌하다. 판사들은 목소리를 내는데 검사들은 왜 침묵하느냐는 것이다. 요즘 사석에선 이런 화두가 곧잘 화제가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신영철 대법관 문제에 대해 전국 26개 고등·지방법원 중 17개 법원의 판사 495명이 '신 대법관의 행위는 부적절하다'고 결의 내지 의견을 낸 사법부에 비해 외형적으로 비쳐지는 검찰 내부는 조용하기만 하다. 임채진 전 검찰총장의 수사지휘권 발언 파문만 빼면 말이다.

물론 이는 검찰 조직의 특수성을 십분 이해한 견해라기보다는 단순히 현상을 말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검찰을 향해 너도나도 종주먹을 휘두르며 성토하는데도 왜 당하고만 있느냐는 반문인 것이다.

지금까지 검찰 개혁을 놓고 숱한 주장들이 제기됐지만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 인적 쇄신과 제도적 손질이다. 사실 검찰에 개혁이 필요하다면 그 답은 여기에 다 들어 있다. 전자가 소프트웨어라면 후자는 하드웨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넘쳐나고 있는 검찰에 대한 진단과 해법은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검찰에 대해 마치 한풀이식 메스를 가하는 여론이 특히 그렇다. 외부 세력의 개입을 통해서라도 검찰을 개혁해야 한다고 부추길 정도이니 말이다. 검찰의 독립을 내세우면서도 되레 검찰권을 부정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검찰은 기존의 제도와 인적 인프라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합목적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다만 이를 운용하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면 그럴 수 있다. 때문에 검찰 개혁의 핵심은 그 역할을 방해하려는 '세력'을 적출해 처방을 내리는 것이지 그 피해자격인 검찰에 근본적인 책임을 지우자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여론은 검찰 조직 자체가 마치 원초적인 죄인 집단인 양 매도하고 있다.

굳이 죄를 묻겠다면 국가 권력구조에 칼을 들이대기 바란다. 검찰권을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못된 정권에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

어쨌든 검찰은 변해야 한다. 국민들의 입장에서도 이는 간절한 소망이다. 사법부와 국정원, 경찰이 모두 과거사 정리에 나서며 역사적 과오에 대해 국민 앞에 사죄를 구했지만 유독 검찰만이 꿈쩍도 않고 있다. 이들 기관이 굴절된 역사를 만들기까지는 검찰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는데도 말이다. 검찰의 이런 독선이 검찰권 독립에 대한 국민불신을 키운다면 부인하겠는가.

우선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에 잘못이 있었다면 깨끗히 인정하는 용기가 절실하다. 수사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존중받기 위해선 "윗선으로부터 수사지휘를 많이 받았다"는 임채진 전 검찰총장의 고백에 대해서도 검사들의 고해성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기사와 관련된 고소고발 때문에 과거 검찰청에 들락거리며 그곳 종사자들에게 느낀 감정은 "그 직업도 참 피곤하고 힘들구나"였다. 검사 개개인이 단독제 관청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그 이면엔 그들이 그렇게 욕먹고 있는 '검찰권'과 피의자의 방어권을 사이에 두고 늘 시험에 내몰리는 격정의 나날들이 있다. 그들의 고뇌와 신역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일방적인 매도여론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노무현 정권 초기에 검찰권 독립을 놓고 살아있는 권력과 맞짱 토론을 벌이던 평검사들의 기개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검찰에는 이들 검사가 있다. 그리고 검찰의 개혁이 됐건 혹은 독립이 됐건 그 주역은 바로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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