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 할 때를 아신 분 -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떠나야 할 때를 아신 분 -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5.26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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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권희돈<시인·청주대교수>
   나에게는 눈물이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줄 알았다. 자칫 어떤 뇌관을 잘못 건드리면 어리어리한 것이 눈앞을 가려 평정심을 잃을 것 같아 조심조심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뜻밖에 서거하셨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애도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얼마 전까지 욕을 바가지로 해대던 국민들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건 민중의 마음이다.

정말 뜻밖의 일일까. 눈을 다시 한 번 뜨고 보자. 왜 저 많은 사람들이 분향소로 몰려드는가. 저들의 눈을 보라. 그리고 자기 자신의 눈을 보라. 얼마나 허탈하고 허전한 눈이더냐. 국민을 윽박지르는 지도자, 지켜지지 않는 약속, 전국 산하를 들쑤셔놓고 방치하는 강심장. 국민들은 얼마나 실망을 거듭하여 왔던가.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죽는 순간에 삶의 대차대조표가 작성된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의미가 남아서 산자에게 일깨움을 준다.

그분께서는 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고생 끝에 성공했으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지역주의를 타파하였으며, 깨끗한 선거문화를 정착시켰다.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권위주의를 배격하여 인간은 누구나 다 평등하다는 사실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기억나지 않는가. 그분께서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곧바로 청남대를 우리들의 품에 넘겨주었을 때 우리는 쌍수를 들어 환호하고 갈채를 보내지 않았던가. 우리가 그분에게서 인간적인 냄새를 물씬 맡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었다. 비록 소수이지만 이들에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주지 않았던가.

대다수의 국민들은 모르는 것 같지만 다 알고 있다. 이렇게 조목조목 말하지는 않아도 느낌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비로소 미몽에서 깨어나 진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말보다 거칠고 투박하고 직설적인 말에 진실이 담겨 있음을 이제사 깨달은 것이다. 진실은 이처럼 늦게 드러나는 속성을 지녔다. 애도의 물결이 한반도를 넘어서 지구촌 밖으로까지 넘쳐흐르는 것은 바로 진실의 힘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슬픔의 강물에 빠져 있다. 슬픔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 싶다면, 초점 잃은 눈으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휠체어에 망연히 앉아 있는 권양숙 여사의 모습을 보라. 슬픔이 깊으면 말을 잃는 법이다. 애통하다 하면서 이처럼 말을 많이 하고 있는 나의 슬픔은 시간이 가면 곧 치유될 슬픔인지 모른다. 나는 그게 두렵다.

그분께서는 퇴임 후 곧바로 고향으로 가셨다. 우리 헌정 사상 어떤 정치인이 퇴임 후 고향으로 갔던가. 짐승도 말년에는 고향으로 머리를 둔다는데, 고향에서 여생을 잘 마치도록 아량을 베풀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행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끝났다. 그리고 길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분의 여행은 끝났지만 다시 시작되는 길은 남은 우리들의 몫이다. 그분의 꿈은 우리들의 꿈과 같았다. 슬픔의 원천이 그것이다. 그분께서 진정 영면하시기를 원한다면, 그분께서 이루고자 했던 꿈을 우리가 하나하나 실천해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 모두는 거점┍ 자신을 죽이고 진실된 자아로 다시 태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분께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신 것을 두고 왈가왈부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왈가왈부 말하는 사람들과 그분과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그분은 떠나야 할 때를 아신 분이시다. 아,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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