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그날
기다리는 그날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5.05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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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조영의 <수필가>
조영의 <수필가>

여행은 준비할 때가 더 행복하다. 떠나야 할 날짜를 마음속으로 당겨 놓고 그곳에서 일어날 일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된다. 나는 되도록 이면 여행지를 미리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보고 부딪치며 느낄 때야만 여행의 묘미가 있다.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여행을 간 곳은 팔공산이다. 지금은 소식이 뜸한 시인 k와 또 다른 시인 k는 거의 같이 지낸다 싶을 만큼 가깝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의기투합한 것이 여행이었다. 사실 팔공산으로 정한 것도 k의 친구가 그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구행 첫 여행은 예기치 않은 태풍의 방향으로 산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날씨를 미리 알아보지 못한 것을 탓하며 서둘러 오는 동안 나는 일찍 집에 올 수 있음이 더 다행이었다.

집은 더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아이들도 엄마를 찾지 않고 잘 놀았다고 했다. 내심 고마우면서도 왠지 서운했다. 나만 불안했구나, 내 부재의 그늘을 느끼지 못했구나, 은근히 부아가 나기도 했다.

그날 이후 문학기행을 핑계로 혹은 세미나 때문에 또는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여행을 자주 떠났다. 여행을 하는 동안은 온전한 나를 찾을 수 있고 일상의 번잡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았다. 여행은 중독이다. 돌아오면 다시 떠나고 싶고, 떠나면 집으로 오는 여유를 즐겼다.

그 해 가을은 대천에서 모임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한두 명 정도는 미운 사람이 있는 법. 가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관계가 좋지 않았던 사람도 끼어 있다는 것이 내심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었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혼란스러웠다.

결국 친구와 함께 양희은 콘서트를 보러 공군사관학교로 갔다. 진입로 가로수 은행잎이 노을빛에 더 아름다웠다. 즐거워 하는 친구와는 달리 나는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이다. 모임에 가지 않고 늦게 들어온 내게 남편은 화부터 냈다. 나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당신 없는 집에서 맘껏 뒹굴고 싶고, 잔소리 안듣고 싶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는데 내 자유를 빼앗았다. 지금까지 당신은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신의를 지키지 못한 행동보다 내 자유를 빼앗은 것이 더 밉다. 꽝, 문닫는 소리가 요란했다.

남편의 말은 낯설었다. 이 사람이 내 남편이었나. 남편도 혼자만의 자유를 꿈꾸고 있었던가. 벽을 사이에 두고 멀어진 남편과 화해의 시기를 놓쳐버린 사람과의 사이를 오가는 밤은 어둡고 길었다

올 해 둘째도 대학에 들어가서 타지에서 산다. 신혼 때처럼 다시 둘이 되었다. 아이들이 없는 빈 공간이 허전하면서도 달콤하다. 그래도 여행 만큼 나를 설레게 하는 일은 없다. 며칠 후 여행을 떠난다. 이번에는 긴 여행이다. 남편은 처음으로 혼자 남을 것이다. 그가 꿈꾸던 자유의 시간이다. 나도 남편도 특별한 여행이 될 그날이 조금씩 가까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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