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기독교 전파
<173> 기독교 전파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4.20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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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덕의 오버 더 실크로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야경모습.
문화적 차이 '한지붕 두가족' 분화


동방정교회 - 로마가톨릭 … 교권 놓고 대립양상
포티우스 대주교, 교황에 대한 예속 부인 '대립 심화'
1054년 파문처벌 폐지 합의 … 동·서방간 갈등 봉합


예수 사후 기독교는 예수의 사도나 제자들을 중심으로 초기의 교회를 형성하였다. 기독교는 출현 초기부터 상이한 문화적 배경을 갖고 동·서방 기독교로 그 흐름을 달리하면서 성장하였다.

서방기독교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를 무대로 확산되었다. 초기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종파쯤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방관과 무시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2세기를 넘어서면서 기독교는 강력한 지도체제를 갖춘 종교조직으로 성장하고 전통적인 로마의 종교에 대해서도 점차 도전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피에타 상.

3세기 초(202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유대교와 기독교로 개종하는 자는 가차 없이 사형에 처하였다. 그 후 로마제국과 기독교 사이에 얼마간의 평화공존이 유지되기는 하였으나, 303년 디오크레티아누스 황제는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 신자들을 모든 공직에서 파면하고 기독교 관련 건물과 서적을 파괴하고 폐기하도록 하였다.

유럽 역사에서 5세기 서로마제국의 멸망에서 15세기 동로마제국의 붕괴까지 약 1천년 동안의 중세는 기독교가 게르만과 슬라브 민족 속에 전파되어 지중해지역의 국지적 종교에서 유럽세계 전체의 범지역적 종교로 확산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동방기독교와 서방기독교 즉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결별(1054년)함으로써 명목상으로나마 지탱해오던 기독교의 통일이 깨지고 그 중심이 지중해지역에서 유럽 내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유럽의 지배종교로 변한 서방기독교는 16세기를 전후로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의 종교개혁을 계기로 기독교에는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의 두 주류가 형성되었다. '모든 곳에 있는'혹은 '보편적인'이란 뜻의 그리스어 '가톨리코스'에 어원을 둔 가톨릭은 기독교 초창기부터 있어 왔던 여러 교회세력 가운데 가장 유력한 교회에 붙여진 명칭이었다.

'항거하는 이들' 혹은 '저항하는 이들'이란 뜻의 '프로테스탄트'에서 파생된 프로테스탄티즘은 16세기에 발생한 종교개혁의 결과로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 등 북유럽 일원에서 출현한 기독교의 신흥 교파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종교개혁의 산물로서 로마교황권의 쇠퇴와 십자군운동의 여파, 르네상스의 도래,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의 민족주의 대두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함으로써 비로소 출현하였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티즘은 성서의 가르침에 대한 유일 규범화와 성서의 권위에 대한 강조, 보편적 제사장직에 대한 신자들의 신앙 등을 특색으로 한다.

기독교사에서 발생한 최대의 사건은 로마제국의 국교였던 기독교 내부에서 교의(敎義)에 대한 논쟁이 벌어져 동방교회들이 분리되어나간 사실이다. 4~5세기에 발생한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을 비롯한 교의 논쟁에서 451년에 열린 제4회 공의회에서 칼케돈 신조로 일단 정립되었고 동·서양 교회는 그것을 전통적인 신조로 공인하였다. 황제의 권력과 밀착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이를 계기로 이 신조를 전체 기독교 교회의 통일된 신조로 약정함으로써 제국 내의 모든 교회에 대한 지도권을 확립하려고 꾀하였다. 그러나 그 같은 발상은 오랜 전통을 지켜온 동방의 여러 교회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샀다. 그 결과 5세기 이후 칼케돈 신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단성론파(單性論派)나 네스토리우스파는 동로마제국의 정교회에서 독립하여 여러 다른 교회를 형성하였다.

4세기 이후 동·서방 기독교간에 교권을 둘러싼 대립양상은 867~900년까지 벌어진 이른바 '포티우스 분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포티우스 분열의 주된 쟁점은 로마가 모든 교회에 대한 군주적 관할권을 소유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포티우스가 로마교황에 대한 예속을 부인함으로써 발생한 이 사건을 계기로 동·서방 기독교간의 갈등과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1054년 6월 16일 채룰라리우스 총대주교가 성찬식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로마에서 파견된 훔베르뜨 추기경은 아야 쏘피아 성당 제단에 '교황의 이름으로 이단자 미카엘 체룰라리우스 및 그를 추종하는 모든 자들을 파문한다'는 파문칙서를 내놓았다. 이로써 동·서방 기독교는 최종적으로 분열되어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로마교황 빠울루스 6세와 동방정교회의 전교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1054년의 파문처벌을 폐지한다는 데 합의함으로써 900여 년간 지속되어온 동·서방 기독교간의 결별은 공식적으로 폐기되고 갈등은 봉합되었다.

동·서방 기독교의 이와 같은 역사적인 갈등과 대립·결별은 기독교의 전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결별 후 서방기독교는 크게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양분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방기독교권을 이루고 있으며, 동방기독교는 크게 동방정교회와 동방독립교회(東方獨立敎會), 동방귀일교회(東方歸一敎會)로 구분되어 지금까지 동방기독권의 맥을 잇고 있다.

동방정교회의 중핵은 그리스정교회의와 러시아정교회이다. 동방정교회의 조직은 명목상의 수위권을 지니고 있는 콘스탄티노플의 전 세계 총대주교의 예하에 있는 단위 교회들의 집합체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 동방정교회의 단위 교회들은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등 고대 총주교좌와 러시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사이프러스, 그리스, 폴란드, 알바니아, 그루지아, 슬로바키아, 아르메니아 교회 등 15개를 헤아리고 있다.

동방독립교회는 로마의 교황이나 콘스탄티노플의 전 세계 총대주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일련의 동방기독교인들의 집합체이다. 동방독립교회는 일반적으로 비잔틴문화의 영향을 적게 받았기 때문에 여타 동방기독교 교회와는 다른 패턴으로 발전하였다.

이들 중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이다. 이 파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파문된 후 활로를 찾아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7세기 '경교'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전파되었으며, 그 여파는 한반도까지 미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처럼 동방기독교는 고대와 중세 및 근현대를 거쳐 각기 다른 문명권에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비잔틴제국과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문명권,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 문명권에서는 주로 동방정교회가 주도한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이슬람 문명권이나 페르시아 문명권, 인도문명권, 불교문명권, 한(漢)문명권 등 기타 문명권들에서는 동방독립교회나 동방귀일교회의 형태로 소수파 종교로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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