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종교개혁과 돈
<169> 종교개혁과 돈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3.24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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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덕의 오버 더 실크로드
1000년 가톨릭 분리시킨 '돈의 힘'

프로테스탄트의 공격에도 몇몇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교황은 트리엔트공회의를 소집하였다.

루터의 돌출 행동이 종교개혁을 불러일으킨 반면 트리엔트공회의의 강령은 반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는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 신앙을 인정한 이래 예술가들에게 가장 많은 경제적 혜택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다.

트리엔트공회의는 예술행위를 통해 가톨릭을 선전하고 교훈을 주는 것이 옳다는 견해였다. 홍보에는 많은 돈이 들고 교황의 재정이 여유가 있으면 예술가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때마다 로마는 오늘날의 모습으로 한 단계씩 발전했고 헐린 중세 건물들 사이로 시내를 관통하는 성 베드로 성당으로 이어지는 거리들이 눈부신 모습으로 변모했다. 돔형 지붕이 로마의 하늘 여기저기에 솟아올랐고 교황들의 친척 또한 이에 가세해 저마다 자신들의 저택을 지었다.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는 시가지의 모습은 유럽의 꽃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적 개념과 먼 돈이 천년 이상 지탱하던 가톨릭을 분리시켰고,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 또한 돈이 뒷받침 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돈과 예술은 부적절한 관계이지만 불가분의 관계로 끊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 지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건물이 있다면 그것은 성 베드로 성당일 것이다.

대성당을 나와 광장 한복판 오벨리스크로 향했다. 남성을 상징하는 오벨리스크는 뜨거운 태양 아래 눈부신 햇살을 찌르고 있다. 대성당 정면으로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웅장하고 기품 있는 쿠폴라(돔)가 주변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그 엄청난 돔의 낙성으로 그 위에서는 시내의 어느 곳이든 한눈에 굽어볼 수가 있는 곳이다. 돔은 조화가 잘 이루어진 창문들과 건축상의 장식물인 프론토니와 수백 개가 넘는 삼각측량으로 위에 큰 북 모양으로 얹혀 있으며 두 개의 쌍을 이룬 원주들로 구분된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거나 537개의 계단으로 돔의 최상단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이곳에서 아름다운 로마의 전경을 즐길 수 있다.

광장 한가운데 선 오벨리스크 양 옆으로 3개의 물받이가 있는 베르니니가 만든 아름다운 분수 가에 앉았다.

작열하는 햇살을 향해 솟구치는 분수대의 물줄기는 세월의 빛줄기를 아는지 무심하게 허공만 할퀴고 있다. 유럽문화의 뿌리와 심장 속을 걸어 다닌 기분이다.

바티칸에는 인류문화를 이끌어온 로마제국의 체취와 유럽문화의 진수가 살아 숨 쉬고 있는 문화의 보고(寶庫)임을 느낄 수 있다. 선진 동방문명인 중국과 이슬람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럽의 르네상스가 인간에 대한 본성과 자각을 통해 신 중심사회에서 탈피하여 자유스러운 창의성을 통해 세계문명을 지배할 수 있는 영향력을 축적할 수 있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각 나라 고유한 문화는 우열을 비교하는 잣대는 아니지만 로마와 바티칸이 간직하고 있는 유산은 하나의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인류문화의 유산임에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가끔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 전후가 구분되는 세계의 시간구분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있다. 중국이 유럽 대신 세계의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며 불교를 국교로 하는 제국을 건설하였다면 황제의 연호를 쓰는 대신 불기(佛紀)를 사용하여 세계의 시간구분을 사용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이슬람이 세계최고의 문명을 구가하며 발전된 힘을 바탕으로 이슬람력을 사용하였다면 세계의 시간구분은 어떠했을까. 각 나라마다 쓰는 통치자의 연호 대신 누구로 통일하여 사용하였을까. 세계의 어느 인물 탄생을 기점으로 하거나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할 때 시간의 구분은 많은 혼란과 다양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것이다.

중세 암흑시대에서 벗어나 후진 문명이었던 유럽이 중국과 이슬람의 선진 기술과 문명을 받아들여 중상주의와 제국주의 깃발아래 세계를 지배하는 패자로 군림하여 기독교문명을 기점으로 한 시간구분을 사용하여 오늘날 세계가 공통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문명은 인류문명의 중심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연과 더불어 생존을 도모하였던 고대인들은 주변의 자연지형과 현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자연에 영향을 많이 받는 해와 달을 비롯한 자연현상과 지형지물을 숭배하고 그 일환으로 제사를 올리고 경배를 드렸을 것이다.

인류종교 문화의 발상지인 인도의 역사는 아리아족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기원전 2000년을 전후해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 걸친 고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주로 했던 인도유럽어족은 아마도 인구의 증가나 가뭄 등과 같은 기후상의 변화로 인해 새로운 목초지를 구하기 위해 원주지를 떠나 일부는 서쪽으로 향해 유럽의 민족이 되었고, 다른 일부는 동쪽으로 향하여 아시아로 들어온 이들을 인도-이란인이라 부른다.

그 후 그들의 일부는 이란으로 들어가 아리아계 이란인이 되었으며 조로아스터교의 성전인 아베스타를 성립시켰다. 이들의 일부는 기원전 1500년경 또다시 남동쪽을 향해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서북 인도에 들어가 인더스 강 상류의 펀잡 지방을 차지하여 인도 아리아인이 되었다. 원주민을 정복하고 인도에 정착한 그들은 브라만교의 성전인 리그 베다를 편찬하였다. 그러므로 조로아스타교의 성전인 아베스타와 브라만교의 리그 베다 성전의 언어에는 신의 이름과 제례의식에 관한 술어가 공통된 것이 많다.

이란으로 진출한 아리아계 이란인은 BC 6세기경 조로아스터가 아베스타를 경전으로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하였다.

선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신 아리만과의 대립을 중심으로 선신의 최종적 승리를 신앙의 근간으로 삼는 이신교(二神敎)이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교로 융성하였으나 제국의 멸망과 7세기 이슬람교의 등장으로 쇠퇴하여 소수의 종교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실크로드를 통해 남북조 시대에 전파된 조로아스터교는 태양, 별, 불 등을 선신이 나타난 것으로 보고 숭배하였기 때문에 일명 배화교(拜火敎)라고 불리었으며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 성행하였다.

조로아스터교의 선과 악, 밝음과 어둠과 같은 이분법적인 사상은 후에 기독교 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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