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167>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3.09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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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덕의 오버 더 실크로드
르네상스시대 견인한 열정·예술 魂 그대로


4년6개월여 걸쳐 회화 역사상 최대규모 천장벽화 완성
생기 넘치는 화려함… '빈곤한 색채의 화가' 통설 뒤집어


미켈란젤로는 일생동안 혼신을 다해 정열을 바쳤던 조각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요청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회화에서 전대미문의 대작이 탄생하게 되었다.

회화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어려운 천장벽화를 조각가가 완성해 낸 것이다. 짧은 시간에 그 이전도 그 이후에도 흉내 낼 수 없는 작품을 완성함으로써 회화의 세계에서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천지창조'가 완성된 지 23년이 지난 후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미켈란젤로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준 바오로 3세는 이제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에만 전념해 주기를 바랐다. 바오로 3세는 최후의 심판을 유채로 그려주기를 바랐지만 미켈란젤로는 작은 규모의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기 때문에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리겠다고 대답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하듯이 장식적인 것을 철저히 무시하고 인간을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추어서 시스틴 예배당 제단 뒷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되었다.

당시 회화에서는 완전히 벌거벗은 사람을 그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가슴속에 타오르는 열정을 근육의 형태가 아니라 시선이나 얼굴표정으로 표현하는 것이 당시 회화의 공식이었다.

그 사이 로마는 외적의 약탈로 황폐되고 유럽은 종교개혁으로 교회는 분열되어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개인적으로 부친과 형제를 사별하는 인간적인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이런 개인적 시련 탓인지 '천지창조'에서 보여주었던 생명력과 화려한 색채 감각에 비해 매우 음울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고 있다. 1535~1541년 사이에 완성된 '최후의 심판'은 축복 받은 자이건 저주 받은 자이건 분노에 찬 예수그리스도 앞에 모두 몸을 움츠려 자비를 구하고 있다.


391명의 인물들이 심판주인 거룩한 그리스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스도의 양 옆과 그 위에는 선택된 사람들이 있고 중간에서는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며 하단은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크론테와 미노스에게 인도되고 있다.

거의 나체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당당하고 근육질로 묘사되었으며 심각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으나 대체로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그릴 때 이 그림에 비판을 가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는 외설적인 면에 대해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교황 바오로 3세는 예식담당 추기경인 비아지오 다 체제를 대동하고 미켈란젤로가 작업하고 있는 곳을 자주 방문하였다. '최후의 심판'이 절반쯤 완성되었을 때 바오로 3세의 의전 담당관으로서 교황을 수행하여 그 위대한 벽화를 보러 간 비아조 추기경에게 미켈란젤로의 벽화에 대해 의견을 묻자 추기경은 그림에 나체들이 너무 많아 외설적이라고 혹평했다. "이런 그림은 교황의 성당보다 여관에 어울리는 것"이라며 혹평을 퍼부었다.

이 말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격분하여 제우스와 에우로파의 아들이며 지옥의 재판관인 미노스의 모습으로 벽화의 오른쪽 밑 지옥의 입구에 추기경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뱀이 그의 가슴을 칭칭 감고 있다.

예술가에게 말 한마디 잘못하여 영원히 지옥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비아지오 추기경의 모습을 생각하니 측은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최후의 심판이다.

그러나 비아지오 추기경도 세기적인 명작 '최후의 심판'에서 지옥을 지키는 미노스로 탄생하여 미술사에 길이 남을 재판관이 되었으니 그 또한 미켈란젤로의 분노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교황 피우스(비우) 4세는 이 벽화를 '나체의 목욕탕'이라고 단정하고 화가 다니엘레 다 볼테라에게 명하여 여러 인물에게 옷을 그려 입혀 넣도록 하였다.

그래서 옷을 그려 입힌 다니엘레 다 볼테라는 '기저귀를 만드는 화가'라고 불려지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예수가 수염이 없다느니, 아폴로를 닮았다"느니 하는 시비가 계속되었다. 심지어 교황 클레멘테 8세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아예 모두 지워버리려고까지 하였다. 나체가 많아 외설적이라는 혹평을 한 그 당시 비아지오 추기경의 입장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을 그리는 데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1541년 크리스마스에 그 그림을 공개할 때 그의 나이는 벌써 67세였다. 미켈란젤로와 경쟁을 벌였던 브라만테는 1514년, 라파엘로는 1520년에 세상을 떠났다. 젊은 시절부터 경쟁을 벌였던 위대한 예술가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지만 미켈란젤로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장수를 하였다.

그는 예술의 신처럼 우뚝 섰고 모두가 그의 작품을 모방할 뿐이었다. 마침내 미켈란젤로는 젊은 시절부터 망령처럼 그를 따라 다니던 음모와 질시를 이겨낸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승리는 경쟁자를 잃게 되면서 그를 온전히 평가해줄 사람마저 잃고 얻은 서글픈 승리였다.

1980년부터 '천지창조'의 천장화 위에 수백 년 동안 누적된 때와 두꺼운 먼지층을 닦아내는 복원작업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진행되었다.

복원된 그림들의 색채를 보면 현란하고 생기가 넘치며 화려하다. 색채가 빈곤한 화가로 알려진 미켈란젤로에 대한 통설은 완전히 뒤엎어지게 되었다.

그림물감과 석회가루가 떨어지는 천장에 매달려 4년 6개월 동안 홀로 그린 그림들을 쳐다보면서 수많은 생각들이 무수히 교차되었다.

시력은 거의 다 잃고 몸은 다 부숴져 성한 곳 없는 고독한 한 인간이 천장벽화 위에 펼쳐 놓은 그의 예술혼을 바라보면서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림과 조각은 '내 마음속에 흐르는 하나의 시'로 승화시킨 세기적인 천재예술가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고 있는 것 같다. 친구도 이웃도 없이 오직 창작활동을 벗과 연인 삼아 의지하며 살아온 미켈란젤로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 깊이 경외감을 표하며 성 베드로 광장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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