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부터 저울질하라
자신부터 저울질하라
  • 권혁두 기자
  • 승인 2009.03.05 2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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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권혁두 부국장 <영동>

"군수 자리가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막상 자리에 앉고보니 지역 권력의 100%를 잡는 셈이더라. 마음만 먹으면 지역에서 못할 일이 없을 정도다." 도내 한 단체장이 주석에서 지인에게 했다는 얘기다. 자신이 누리는 제왕적 권력을 한잔 술의 힘을 빌려 솔직하게 과시한 것이다.

누군가 한국에는 '230여개의 왕국'이 있다고 했는데 틀린 얘기가 아니다. 지역을 움직이는 돈과 사람(인사)을 장악한 단체장의 절대 권한은 민간에서도 무소불위다. 견제기구인 지방의회 의원들은 단체장과 같은 정당이라는 연으로 맺어지기도 하고, 선거구 기반을 닦기 위해 군수의 권한에 의존하면서 힘을 잃은 지 오래다. 지역 언론들과는 최대 광고주라는 지위를 이용해 상부상조 관계를 유지한다. 비판기사가 잇따르면 광고를 중단하기도 하니 경영이 취약한 언론사들은 단체장에게 대놓고 날을 세우기 어렵다. 민간단체들은 보조금으로 휘어잡는다. 밉보이면 운영비도 타내기 어려우니 단체장 눈치를 보지않을 수 없다. 툭하면 신하들의 상소에 시달리던 조선시대 군주들과 비교하더라도 사법권만 없을 뿐이지 왕도 이런 왕이 없다.

단체장의 권력이 위험한 것은 이렇듯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임기 중 지역의 흥망이 고스란히 그의 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능하거나 부패한 단체장을 만나면 다음 선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단체장을 탄핵할 수 있는 주민소환제가 있지만 아직까지 성사된 사례가 없을 정도로 유권자들에게는 낯선 제도다.

이렇게 단체장의 권력이 절대적인 만큼 그 행사가 진중하고 겸허하게 이뤄져야 하지만 실상은 실망적이다. 선거판의 권모술수와 이전투구에는 강하지만 권력과 직위를 감당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은 모자라는 인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갖가지 구설을 낳는 사례가 허다하다. 임기 초에는 자못 겸허한 자세를 보이다가 얼마 안가 절대권력의 단맛에 중독돼 권위와 오만에 빠지는 것이 이들이 밟아가는 순서다. 주체할 수 없는 권력을 만나 희롱당하다가 급기야 거기에 빠져 자신이 누군지조차 잊어버리는 것이다.

'군수라는 자리가 이 정도일 줄 몰랐다'는 말은 술자리에서 남에게 옮길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던져 자문하고 자책해야 할 말이다. 내 깜냥이 이 엄청난 자리에 걸맞은지 묻고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 스스로를 책망하는 데 쓰여질 말이라는 것이다.

지방선거가 1년 후로 다가오며 지역마다 단체장 출마자들의 발길이 분주해지고 있다. 그러나 절대권한을 냉철하게 행사하며 지역을 온전하게 경영할 인물들은 별반 눈에 띄지 않는다. 자리에 대한 욕망과 판세에 대한 탐색만 있을 뿐 자신이 종지인지 양푼인지 역량을 저울에 달아보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얼마전 내년 단체장 선거 출마자로 유력하게 거론돼 온 한 인사가 불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단체장 자리는 무한한 봉사와 열정, 능력을 두루 갖춘 사람만이 맡아야 하는 자리다. 나는 어느 하나 갖추지 못했으니 자격이 없다." 정치판이 워낙 의뭉스러워 이 말의 진정성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들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한 이런 인물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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