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의 문학칼럼]시간에 눈먼 사람들
[박홍규의 문학칼럼]시간에 눈먼 사람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1.29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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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문학 칼럼
박 홍 규 <교사>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앞을 보지 못하게 된다. 처음엔 몇 사람에게서 보이던 증상이 결국은 도시 전체로 퍼진다. 소설적 장치로 한 명은 예외로 설정되지만, 아무도 더 이상 세상을 볼 수 없다. 시각을 잃은 사람들의 도시와 그 도시에서 벌어지는 생존의 적나라함, 비극이다.

소설에서 아무리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져도 그것은 가상이다. 가상은 가상이어서 재미있다. 실제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얼마나 끔직할까마는 다행이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안심은 상투적이다. 물리적인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부여도 상투적이다. 도시 사람 전체가 실제로 눈이 멀어버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돈에, 사랑에, 욕망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차고 넘치는지 알기 때문이다.

사실 무엇엔가 눈이 먼 사람들은 흔하다. 돈이건, 사랑이건, 권력이건, 욕망이건 그런 것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은 뻔히 보이는 길을 제대로 걷지 못한다.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상처를 입는다. 다행히 그런 모습이 눈에 띄면 저마다 그들을 바로 세워주려 하고 길을 알려주는 관심을 기울인다. 사람들은 이 소설에서 눈이 멀지 않은 인물 '의사의 아내'가 맡고 있는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안심해도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쨌든 사람들이 무엇엔가에 한꺼번에 눈이 멀어버리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눈을 제대로 뜨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알려주고 이끌어준다. 그러하리라는 기대도 크다.

그런데 소설처럼 모두가, 거의 전부가 무엇엔가 한꺼번에 눈이 멀어버리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기우일까. 공연한 걱정만은 아니다. 시간에는 어떠한가. 또 속도에는 어떠한가.

시간의 층위는 천문학적 개념의 시간에서부터 나노 물리학에서의 시간까지 무한히 다양하다. 사람의 삶의 기간 안에서도 시간들은 수많은 길고 짧음이 셀 수 없는 상대성과 주관에 의해 다르게 존재한다. 빛이 무수히 많은 색채를 만들어 내듯 그리하여 우리가 천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렇게 많은 존재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시간도 그런 방식으로 삶에 개입한다. 그러나 시간에 눈 먼 사람들은 하나의 시간만 따져든다. 소설 속 눈 먼 사람들이 오직 흰 빛만 볼 수 있듯, 그들은 오직 자기 앞의 짧디짧은 시간만 확인하고 그것에 집착한다. 하루하루의 성과에 모든 것을 걸어버린다. 당장 지금 이 시간만을 즐기거나 모면하고자 노력한다. 시간에 대한 균형감각이나 장기적인 안목은 그들에게 낯설고 비현실적이다. 그렇게 시간에 눈 멀어버린 사람은 속도에도 눈이 먼 사람이다. 속도를 늦추려고 제어한다거나 아예 느리게 나아가는 변화는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다. 삶의 목적은 오직 생존이 되어버리고 그 내용은 눈 먼 사람들의 그것처럼 적나라해진다. 역시 비극이다.

그렇듯 시간에 눈 멀어버린 사람, 속도에 눈 멀어버린 사람들은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충분히 보살펴 줄 수 있을 정도로 소수 인원이 아니다. 많다. 기우는 구체화된다. 이미 넘치도록 가속되어 있는 삶의 속도는 균형감각을 찾고자 하는 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시간의 폭 넓은 스펙트럼을 살피려는 벗어남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조차 시간에 눈이 멀도록, 멀어버릴 수밖에 없도록 시스템은 강화되어 간다.

소설의 결말은 낙관적이다. 눈이 멀었던 사람들이 다시 정상을 회복한다. 세상의 온갖 빛과 색채를 볼 수 있게 된다. 적어도 소설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읽은 책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정영목 옮김, 2006,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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