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의 문학칼럼]과학
[박홍규의 문학칼럼]과학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1.08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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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문학 칼럼
박 홍 규 <교사>

과학 역사를 다룬 책을 읽었다. 책이 다루는 영역이 넓은 만큼 만만치 않은 분량이지만, 흥미롭다. 우주의 생성에서부터 출발하여 지구에 관련된 전반, 생명의 기원이며 역사, 화석은 물론이고 인간 세포의 특징까지, 거기에 쿼크 단위의 소립자 물리학의 세계도 아우르고 있다. 각 분야를 개척한 과학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도 빠뜨리지 않고 있어 읽는 재미는 배가한다.

그러나 과학의 '눈부신' 발전,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과학이 연구 결과로 내놓는 분명한 지적은 "여전히 우리는 잘 모른다"는 것이다. 글쓴이도 "결국 우리는 나이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도 없고, 거리를 알 수 없는 곳에 있는 별들에 둘러싸여서,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물질로 가득 채워진 채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물리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우주에 살고 있는 셈이다.(p188)"라고 밝히고 있다. 우주만 모르는 것이 아니고 물질의 단위나 운동 원리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지구와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에 대해서도 그러하며 인간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진다면 과학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둘러싼 많은 질문들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해 줄 수 있을까. 알고 싶어 하는 존재나 현상에 대한 어떠한 궁금증이든 마치 신처럼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렇게 더 많이, 더 정확히 알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얼마일까. 시간뿐만이 아니라 막대한 자원도 과학을 위해 함께 투입되어야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앎을 위해 필요한 시간이 도래하기 전에 삶을 지속시킬 수 있는 시간이 먼저 끝나버리리라는 점이다. 인간 개개인 삶의 시간은 물론이려니와 인간이라는 생물종의 존속 기간을 대입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과학에 의한 앎의 확장은 물론 중요하다. 과학이 밝혀놓는 새로운 설명을 접하고, 지금까지의 토대 위에 새로운 지식을 쌓아가는 희열은 '여전히 우리가 잘 모를지라도' 결코 가볍지 않다. 과학의 의의이며 미덕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사실 우리는 과학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과학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근대 이후 인류를 이끌어 온 힘 중의 하나였고 그 기대와 희망의 정도는 갈수록 부풀어 오르고 있다. 그러나 과학에 그렇듯 의존하는 경향은 타당하지 않다. 앎은 다만 삶의 재료일 뿐이기 때문이다. 삶의 재료를 어떻게 사용하고, 나누고, 배치시키는지는 과학이 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그럼에도 여전히 잘 모른다'는 과학적 한계 인식을 존중해야 될 때가 되었다. 지나치게 과학으로 치우쳐버린 불균형을 바로잡을 때가 되었다. 과학이 연구 결과로 쌓아놓은 지식조차 제대로 사용하며 나누고 있다는 확언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 반대의 사례가 더 많다는 지적이 오히려 정확함을 인정해야 한다. 재료만, 그것도 완전치 않은 재료만 창고 가득 쌓아놓은 상태에서 올바른 사용법을 만든다거나 매뉴얼대로 사용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여전히 모으려고만 하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치우침을 고치려면 '과학 아닌 것'이 필요하다. 인문학의 복원이다. 이제껏 삶의 속도는 빨라지고만 있었고, 빨라지는 속도는 손에 쥘 수 있는 결과물을 원하였기 때문에 인문학은 과학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과학적 결과물의 완전성에 대한 회의도 회의려니와 속도를 제어하기 위한 필요에서라도, 앎을 다루는 영역으로서의 인문학이 과학의 위상과 대등해져야 한다. 절제다. 정말 필요한 것은 겸손일지도 모른다.

[읽은 책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더스, 이덕환 옮김, 2008,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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