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슬프고 화나게 만든 필리핀 정권
나를 슬프고 화나게 만든 필리핀 정권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1.27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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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칼럼
이 병 하 <일하는공동체실업극복연대 정책팀장>

최근 7박8일 동안 필리핀으로 연수를 다녀왔다. 이 기간 필자의 마음에 아픈 기억으로 남는 만남이 있었다. 전형적인 필리피노인 가리쉬라는 친구로 해외 이주노동자의 인권옹호활동을 펼치고 있는 미그란떼 대표였다.

필리핀은 인구의 10%인 1000만명 정도가 해외노동자로 나가있고 지금도 매일 3∼400명 정도 해외이주노동자로 출국하고 있다. 문제는 대부분 비전문인력이며, 상당수가 불법체류자 신분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을 알면서도 정부가 이들을 해외로 내모는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첫째는 필리핀 국내에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재 필리핀 경제활동인 가운데 1130만명이 실업상태 혹은 비정기적 노동상태에 놓여 있다.

두번째는 고질적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고, 국가예산의 50%정도가 외채상환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 이유는 국민의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고 복지강화를 위한 대중적 압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라는 것.

즉 국내산업의 난맥으로 인한 실업자 해소와 외채 충당의 방법으로 정부가 선택한 것이 인력수출이었다. 1000만명의 해외이주노동자가 송금하는 돈이 한 달만 정지된다면, 필리핀 재정은 파탄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가리쉬 대표가 말한 필리핀 정부의 태도는 제3자인 필자에게 한 인간으로서 울컥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필리핀 해외이주노동자들 중 사망원인이 불분명한 시신이 하루 6∼10구 정도 필리핀으로 송환된다고 한다. 중동을 비롯한 대만, 싱가포르에서도 근로 도중 사망 혹은 공권력에 의해 사형을 당하는 경우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당국은 무책임성으로 일관해 왔다. 당사자 및 지인들이 자국 정부 혹은 대사관을 찾아가 보호·지원요청을 하더라도 정부나 대사관은 개인적으로 알아서 처리하라고 쫓아냈다는 것이다. 많은 노동자를 해외로 보내놓고도 필리핀 당국에서는 이들의 인권을 위한 기관 및 프로그램을 마련하지 않았다. 시민사회영역에서 자발적으로 인권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데, 이것마저도 국익에 반한다는 이유로 압박하고 있다고 한다. 가리쉬 대표는 정권의 사주로 이미 저격을 받은 경험이 있고 재차 저격을 인지하고 있다고 했다. 필리핀 정부는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2000년도부터 지금까지 1000여명의 운동가를 살해해 왔으니 단체 대표 한명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지.

필리핀 정부는 해외이주노동자로 나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무려 76가지의 승인절차를 요구하고 있다. 여권제작부터 시작되는 무지막지한 양의 절차를 밟는데 무려 한화 54만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된다. 매달 1달러 미만 생활자가 3000만명에 육박한다는 필리핀의 경제상황에서 볼 때, 결코 적은 비용이 아니다.

해외이주노동자의 송금액으로 경제유지의 큰 기반을 챙기면서 정작 이들에게는 엄청난 수속비용을 뽑아내고 정작 필요한 해외에서의 인권문제는 나몰라라 하는 필리핀 당국의 처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 가리쉬 대표는 우리나라에서 3년 이상을 이주노동자로 생활한 경험이 있다. 헤어짐의 악수를 나눌 때, 진정 생애의 마지막 악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필자는 그의 손을 꼬옥 잡으며 "Good luck"이란 인사를 건넸다.

우리나라에도 2008년 현재 45만명 정도의 비전문 외국 노동자들과 22만명 이상의 불법체류자로 낙인찍힌 외국인 노동자가 있다. 대부분 생존을 위해 해외이주를 결심했을 것이고, 필리피노처럼 고국의 지원이 필요한 시점에서 정작 외면당하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세계인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헤아려보라는 역지사지에 익숙지 못한 현실은 녹록지 못하다. 인권운동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현실, 국민을 해외이주노동자로 몰아넣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정권이 존재하는 나라가 시차 1시간 거리에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지역에서 만나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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