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켜주지 못했나?
왜 지켜주지 못했나?
  • 김금란 기자
  • 승인 2008.11.18 22: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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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학교폭력으로 인해 뇌사상태에 빠졌던 한 중학생이 최근 장기이식을 통해 9명에게 새 생명을 주고 떠났다. 지난 16일 이 학생이 다니던 학교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친구와 교사들은 그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너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로 대신했다. 너나 할것없이 어린 나이에 그것도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건에 할말을 잃은 것도 사실이다.

왜 지켜주지 못했을까.

이 학생이 목숨을 잃었던 사건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야 할 사람은 이 학생의 교사도, 부모도, 친구도 아닌 우리 모두라는 생각이 든다. 사건이 발생한 지난 6일 이 학생이 폭력으로 인해 쓰러져 있었던 시간은 오후 5시20분쯤. 그것도 지나가는 행인이 많은 아파트단지였다. 결국 이 학생이 쓰러진 모습을 다수의 시민이 보았다는 얘기다. 다수의 목격자가 있었지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은 셈이다. 지나가는 한 명의 주민이라도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만 했어도 귀한 생명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폭력에 대해 일반적 사회적 시각은 그동안 가해자와 피해자로 한정됐던 게 사실이다. 이번 사건을 보며 가해자에게만 돌을 던질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해봤다. 가해자의 책임과 함께 한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아니 남의 일로 치부해 버렸던 묵시의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단골처럼 등장하는 게 인성교육 강화다. 사람 됨됨이를 교육하기 힘든 현실에서 현실성 없는 정책은 소용이 없다.

프랑스나 중국 등 일부 국가에서 법제화한 착한 사마리안법(남을 도와줄 수 있는 상황에서 돕지 않아 상대자가 피해를 봤을 경우 처벌을 하는 것)이 남의 나라 법으로 볼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릴 수 있었던 생명을 살리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일이 이번 한번으로 그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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