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고프다는 말 남기고
배가 고프다는 말 남기고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1.16 23: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중겸의 안심세상 웰빙치안
김 중 겸 <경찰 이론과실무학회 부회장 전 충남지방경찰청장>

가정교사를 했다. 고교 졸업장 받기 직전부터 입대하기 전까지 입주해서 가르쳤다. 부자동네 장충동이었다. 주인 아저씨는 청계천 평화시장 3층에서 의류제조공장을 운영했다. 아주머니는 1층 가게에서 그 옷을 팔았다.

6·25전쟁시절 평안도에서 월남했다. 좋은 분들이었다. 피란길에 내 또래 아들을 잃었다. 애틋하게 보살펴 주었다. 식모 아주머니는 지병으로 가출했다 한다. 늘 고봉밥 주셨다.

어느 날 공장구경을 갔다. 한 층을 두 층으로 나눠 쓰고 있었다. 한가운데는 텄다. 디자인과 재단을 위한 공간이었다. 나머지는 2층 구조다. 허리를 구부리고 다녔다. 좁은 곳에 재봉틀을 비롯한 기계가 빼곡했다.

재봉사와 보조원이 사수와 조수처럼 붙어 앉아 일했다. 원단에서 나오는 화학약품 냄새가 역겨웠다. 눈이 쓰렸다. 감독을 빼고는 10대에서 20대. 이런 곳에서 어떻게 일하나 걱정됐다. 나도 참.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는 넘겼다.

1970년이었다. 육군사병 복무 3년의 만기 제대를 한달 앞둔 때였다. 11월13일 스물둘 젊은 직공의 분신자살 소식을 들었다. 올 것이 왔다고 자탄했다. 무력했던 젊음.

주인공은 전태일 군이다. 극빈가정 출신. 어머니는 병이 들었다. 아버지는 음주에 술주정. 동생과 부모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일했다. 신문을 팔았다. 구두도 닦았다. 열여섯에 평화시장에 들어갔다.

병들어 가는 소년소녀를 외면치 못했다. 업주와 공무원을 상대하는 길로 나섰다. 근로조건을 개선하라고 요구했다. 결과는 조롱과 냉대와 무관심이었다. 그날 근로기준법 화형식이 있었다. 있으나마나 한 법에 대한 처형. 오후 1시 반. 몸에 불을 질렀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쓰러졌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열매 맺기 시작했다. 노동은 제자리를 찾아 나갔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거대 노조의 기득권 수호를 비난하는 지경이다. 한 청년의 죽음 위에 쌓여진 결실이다. 그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치는 사실을 외면한다. 행정은 침묵으로 동조한다. 교훈이 있다. 요구가 없으면 제도도 없다. 배가 고프다는 말을 남기며 그는 죽었다. 지금 배고픈 사람이 없는가. 차별과 소외와 배제의 그늘은 우리가 투쟁해야 걷어낸다. 다 함께 가는 세상이 안심세상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