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울컥울컥 차오른다. 당연하다는 말이 당연해질 때까지 쏟아부어진 노력은 어떤 이의 입에서 한순간 뱉어진 구토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덩그러니 남은 사람들이 있다. 그 어떤 말도 위안이 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주워담을 수 없는 상황에 물 한 잔을 마셔도 목이 쓰고 밥 한술을 떠도 혀가 따가운 날들이 이어진다. 그저 버틸 뿐이다.
때로는 있는 사람이 더 가지려 하고, 아는 사람이 더한다는 흔하디 흔한 말이 당장 누군가 총구를 내 관자놀이에 대고 장전을 하는 순간만큼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아'를 말해도 `어'로 들리고 `나'를 말해도 `너'를 의미하는 아이러니한 순간에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한지 생각에 생각을 쌓아도 답은 없다. 그저 끊이지 않고 들리는 소음을 참을 수밖에.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면 남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놓친다. 너와 나의 목소리가 엉겨 붙는 그 순간에는 굳건한 신념으로 해야 할 말 한다지만, 우수수 떨어진 지저분한 아집의 잔재는 누가 치워야 할까. 결국 질척질척한 바닥을 맨발로 딛고서 언제 그렇게 큰소리를 냈냐는 듯이 이제는 모두가 입을 닫는다.
눈빛에는 절대로 내 손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굳건하고도 추잡한 결의가 가득하다.
인간관계가 단 한 순간도 쉬운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쉬지 않고 잊을만하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저주할 또 다른 이유가 생기는 현실이 가끔은 놀랍기도 하다. 도대체 인간이 갈 수 있는 최악의 끝과 최선의 경계선은 어디 있는 걸까. `선'이란 게 있긴 한 걸까. 그저 사람의 내면에 언제든 증오를 싹 틔울 수 있는 다양한 씨앗이 태초부터 심어져 있는 건 아닐까. 그 옛날 순자가 말했던 `성악설'은 슬프게도 진짜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성선설'을 믿고 살았다. 내 인생의 일부를 검게 칠하고 여전히 깨끗이 지우지 못한 채 살아가게 한 이들을 웃는 얼굴로 용서하지는 않을지언정 이 모든 것에 전혀 연관이 없는 새로이 만난 사람들에게까지 매캐한 연기를 흩뿌리고 싶지는 않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친절하라, 당신이 만나는 사람 모두가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친절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나에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진실로 믿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다. 사람은 누구나 선하고, 그 선함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친절하겠노라고. 내가 나이기에 나를 걷어찼던 그 모든 기억을 비웃으며 나는 사람이 선하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안타깝게도 그리 성공적이진 않았나 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의견을 가볍게 무시하는 이들을 보며, 내 존엄을 지키고자 다른 이들의 머리끝부터 짓밟는 이들을 보며, 나와 내 아이들만 소중하고 너와 너의 아이들은 어떻게 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이들을 보며 두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서도 불쑥불쑥 화가 차오른다. 악순환이다.
다스려지지 않는 이 분노는 가슴 깊은 곳에서 남모르게 똘똘 뭉쳐 평온했던 마음 밭에 타오르는 씨앗을 뿌린다. 사냥감을 찾으면 바로 싹을 틔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꽉 물고서. “엄마!” 하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웃음이 눈동자에 비치니 저 스스로 재가 되어 날아간다. 바람 따라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다만 어디에도 다시 내려앉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