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대마도의 고려 초조대장경
<11> 대마도의 고려 초조대장경
  • 한인섭 기자
  • 승인 2008.11.03 2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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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임진왜란은 활자전쟁이었나
대마도 역사문화자료박물관은 장송사가 소유 초조대장경 600권을 관리하고 있다. 사진은 박물관 내부 모습

역사문화자료박물관 600권 보유… 한국 고문헌 寶庫

1416∼1487년 사이 수집… 국내 소장본 2배 달해
국내 학계 "대부분 약탈 결과"… 외교적 민감 사안


한·일 교류 거점 역할을 했던 대마도는 초조대장경 600권을 보유하고 있어 한국 고문헌의 보고(寶庫)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경, 유교경전, 의약서 등 문물에 목말라했던 일본이 대마도를 전초기지로 삼아 외교적 노력과 함께 약탈도 서슴지 않았던 결과이다.

대마도역사자료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는 초조대장경은 교토 남선사 것보다는 소량이지만, 국내 소장본의 2배에 달한다. 대마도 도주들이 1416년부터 1487년 사이 71년동안 조선에서 갖가지 방법으로 들여 온 것이다.

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는 대장경은 가미츠시마쵸(上大馬町) 장송사(長松寺)와 대마도 인근 이끼섬(일지도)의 안국사(安國寺)가 각각 소장했던 것이다.

원래 대마도 강덕사가 소장했으나 사찰 후원자였던 지방유지가 몰락하면서 장송사로 넘어갔다.

장송사는 또 메이지 유신 때 안국사를 흡수하면서 초조대장경을 모두 손에 넣었다.

나가사키현이 1985년 지정 문화재로 지정한 초조판은 세로 26.7cm, 가로 10.11cm 크기 판으로 1행에 14자, 1장에 25행, 1면 6행이 인쇄돼 있다.

대마도 이즈하라마치(嚴原町) 금강원은 1238년 인쇄된 재조대장경(대반야경) 한 세트를 소장하고 있다. 대마도의 유일한 진언종(眞言宗) 사찰인 이곳에는 333권의 재조대장경이 있다.

대마역사박물관은 이 대장경이 고려 수도였던 개성의 동쪽 장단도호부에 있던 천화사(天和寺)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사와 신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의하면 천화사는 12세기 초에 창건돼 15세기 무렵 폐사된 사찰. 박물관측은 대장경 오서(奧書·사본 등의 말미에 베낀 사람의 이름, 제작일자, 제작경위 등을 적은 글)에 천화사에서 인쇄했다는 기록을 고려해 개성의 사찰로 추정한다.

박물관에는 대마도 사이후쿠지(西福寺)가 소장했던 원나라 시대 대표적 대장경도 소장돼 있다. 이 원판 대장경은 1277년부터 1290년 사이 중국 항저우(저장성 항현) 남산대보령사가 인쇄한 것이지만 고려 관리가 의뢰해 제작한 것이다. 대장경 오서에는 고려 문하성 관리 조련(趙璉)이 주문해 인쇄했다는 기록 그대로 남아 있다.

대마도에 전래된 경위는 정확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조선을 거쳐 전래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할 수 있다.

박물관측은 1418년 사망한 제7대 대마도주 사다시게가 재임중에 "한 번은 대장경을 보낸 것을 감사하고, 한 번은 대장경을 받았다"고 언급한 기록이 있는 점을 들어 이 무렵 전래된 것으로 추정한다.

서복사(西福寺)가 소장했던 원판대장경은 한·중·일 대장경 전래 경위에 상당한 시사점을 남긴다.

일본은 고려에서 인쇄된 초조대장경을 제외한 원나라판 대장경, 북송, 남송시대 대장경을 직접 수입했다는 입장이다.

특히 교토 남선사 소장 원판, 북송, 남송 대장경도 마찬가지 입장을 보이고 있어 한·일 학계의 공동조사가 요구되는 과제로 꼽힌다. 일본은 다만 대마도 원판대장경은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고려인이 주문해 제작됐고, 사다시게, 사다모리 등 대마도주들이 조선에 요청한 끝에 입수한 점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않아 일본 학계도 학술조사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학자들은 적어도 대마도에 흩어져 있는 고려 대장경은 도주들의 간청에 의해 전래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약탈의 결과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초기 국내 해안 전역과 내륙, 중국연안까지 왜구의 약탈이 자행됐고, 대마도와 인근 일지도, 마쓰우라(松浦)는 주요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이 무렵 왜구들은 작게는 2, 3척 많게는 500척의 대선단을 조직해 연안지역과 내륙까지 쳐들어와 사찰의 불경, 곡식, 노비를 탈취했다.

학자들은 대마도주나 왜구 우두머리들은 약탈한 불경을 서해도와 규슈를 다스리는 다자이후(太宰府)에 헌납하거나, 거래했던 점을 근거로 든다. 또 이들이 소장하고 있는 경전 대부분이 결질이 많은 점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건네진 게 아니라는 점을 방증한다.

역사문화박물관 외부전경. 국내 관광객들이 방문지 코스로 각광을 받는 곳이다.

국내 학자들은 당초 일지도 안국사가 소장했던 대장경을 대표적인 약탈 유물로 꼽는다.

안국사 초조대장경은 원래 경상북도 김해 근처 서백사 불상에 공양됐던 것이다.

김해 부호장 겸 예원사 허진수가 정종 12년(1046년) 어머니의 건강과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양했다는 대장경 오서 내용이 이를 그대로 입증한다.

국내 학계는 마쓰우라 일대 왜구들이 대장경을 약탈해 나가사키(長岐) 히젠의 나가하마 오소명신(五所明神)에게 바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 지방 호족이 1486년 일지도 수호대관(守護代官)으로 부임하면서 안국사에 봉안한 사실도 확인했다.

이런 배경 탓에 대마도 대장경은 외교적으로도 한·일간 민감한 사안이다. 더구나 2005년 대마도에 있던 대장경 일부가 국내로 다시 반입돼 학계를 놀라게 한 사실이 있다. 부적절한 방법으로 다시 국내로 반입된 유물이 문화재 등록 과정에서 서지학자들에게 발견됐고, 일부는 문화재로 지정됐다. 하지만 이 유물은 일본 문화청이 자국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어서 반환을 요구해 놓은 상태이다.

유물을 관리하고 있는 대마도박물관과 소유자 장송사측은 이런 점을 고려한 듯 취재팀의 유물 촬영은 물론 도록 제작과정에서 촬영한 자료 요청 역시 불허했다.


박물관이 소장하고있는 초조대장경(왼쪽) 판본과 전시되고 있는 조선시대 훈몽자회.

◈ 대장경 얻기 위해 단식도 감행

일본은 대장경을 얻기 위해 파견됐던 사신이 단식까지 감행하면서 애걸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조선왕조 실록 세종 5년(1423년) 12월 25일 기록에는 일본 국왕이 배 10척과 135명 규모의 사절단을 파견해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사급(賜給·하사와 같은 말)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있다.

세종이 대장경판은 한 벌에 불과해 응할 수 없다는 입장과 함께 대신 밀교대장경판, 주화엄경판을 주겠다고 통보했다고 한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일본 정사는 "불경을 구하지 못하면 돌아가 '식언죄'로 처벌 받을 게 뻔하다. 차라리 단식을 하다 죽는 게 낮다"며 억지를 부렸다는 것이다.

결국 세종은 애지중지하던 석가보, 화엄경 등 대장경을 건네 돌려 보냈다고 한다.

대마도주와 인근 일지도주들은 왜구들을 단속하고, 피랍자들을 송환하겠다는 조건으로 대장경 사급을 요청했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16년(1416년), 세종 10년(1428년)·16년(1434년)·26년(1444년), 성종 11년(1480년) 등 일본 국왕과 도주들이 빈번히 요구해 불경을 가져간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조정은 일본의 요구가 빈번해 남은 불경이 없다며 거절한 사례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이 무렵 일본으로 건너간 대장경은 대마도와 도쿄, 오카야마, 도치기현 등 일본 전역의 사찰과 개인문고 등에 전해 내려와 귀중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도 이 시기 경학서, 성리학서, 역사지리, 정법서, 의학서, 시문학서 등 많은 유물들이 일본으로 건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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