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와 하나되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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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0.24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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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화의 문학칼럼
한 채 화 <문학평론가>

소설 속에서 사건은 단순히 한 번만 일어날 수 있지만 혹은 반복해서 일어날 수도 있다. 서술적 진술은 생산될 뿐 아니라 다시 생산될 수 있으며 같은 텍스트에서 한 번 혹은 여러 번 반복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때의 반복은 서술된 사건과 텍스트 속에 진술된 사건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할 수 있다. 즉 한 번 일어난 사건을 한 번 진술하는 경우, 한 번 일어난 사건을 여러 번 진술하는 경우, 여러 번 일어난 사건을 한 번 진술하는 경우, 여러 번 일어난 사건을 여러 번 진술하는 경우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승우의 '오래된 일기'(창작과 비평)는 반복적인 진술 가운데 한 번 일어난 사건을 반복하여 진술하고 있다는 서사적 특징을 갖는다. 동일한 사건을 문체상의 변화나 시점의 변화 없이 반복하여 진술하고 있다. 이러한 '반복적(repeating)'인 서사는 독자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듣고 싶어 할 수 있다는 기대지평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적(ritual)인 서사 전략인 셈이다.

좀 지루한 느낌을 주는 회상은 짧은 회상을 통하여 서술의 대상인 '규'와 서술자인 나의 관계를 진술하고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의 우열로 인하여 나는 평평하지 않은 기억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그 기억의 중심에 죄의식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는 성장기에 대한 설명적 진술이다.

'오래된 일기'는 작가와 독자의 욕망에 관한 소설인 셈이다. 서술자인 나는 늘 내 문장의 첫 번째 독자였던 '규'를 염두에 두고 써야만 했다. 늘 독자의 반응을 염두에 두고 그 의중을 헤아리기 위하여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독자의 미세한 표정 변화도 놓치지 않게 되었다. 어떤 문장은 지우고 어떤 문장은 비틀었다.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한 것은 결국 '규'가 되는 꼴이다. 작가의 문장은 독자가 원하는 대로 씌어졌다. 독자는 사실상의 작가였다는 작가의 말은 곧 변두리에서 서성거리던 독자를 텍스트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규'는 발간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잡지에 내가 발표한 단편소설 '카싼드라'를 읽었다. 문인들이나 읽을 잡지에 발표한 소설을 읽었다. 게다가 그 소설뿐만이 아니라 내 작품은 하나도 안 빼놓고 다 읽는다고 그의 아내가 말한다. 20년 전에 실린 첫 소설부터 내 작품 모두를 꼼꼼하게 챙겨 읽는 '규'는 독자의 상징인 셈이다.

작가와 독자의 분리될 수 없는 밀월 관계가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생성·지속되는 한 '나'와 '규'는 둘이면서 하나이다. '규'는 '나'의 독자이며 나는 그러한 '규'를 늘 첫 번째 독자로 인식하면서 소설을 썼다. 바꾸어 말하면 '규'는 늘 내 소설의 독자이지만 늘 내가 소설을 창작하는 데 보이지 않는 손처럼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결국 물과 파도가 둘이 아니듯 소설가인 나와 독자인 '규'는 무의식적 욕망을 바탕으로 하면서 글쓰기의 양방향성이라는 대전제 속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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