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차와 가을
매화차와 가을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0.10 22: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채화의 문학칼럼
한 채 화 <문학평론가>

봄이면 여기저기에 꽃이 핀다. 아름다운 자태를 다투어 자랑하고 향기 또한 바람결을 따라 선율처럼 허공을 날아다닌다. 제아무리 둔감한 벌이나 나비라도 유혹을 뿌리치지는 못한다. 가을에 맺은 열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결실이다. 물론 꽃이 사람들을 위해서 피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향기와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리는 데야 벌 나비와 다를 바 없다.

매화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매화가 피고 그 자리에 매실이 열린다. 게다가 요즘에는 매실이 몸에 이롭다는 소문에 사람들은 매실로 차를 만들기도 하고 장아찌를 담가 두었다가 반찬으로 먹기도 하는데 이 또한 매화의 덕분인 셈이다. 매우기(梅雨期)는 장마철을 일컫는데 이는 매실나무 열매가 익을 무렵에 내리는 비라는 뜻으로, 해마다 초여름인 유월 상순부터 칠월 상순을 이른다. 즉 매실 익는 것을 기준으로 장마철을 삼으니 사람들이 매실이나 매화를 가까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유춘색이라는 사람이 평안 감사로 부임해 매화(梅花)라는 기생과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춘설(春雪)이라는 기생을 가까이 하자 매화가 원망하며 지었다는 유래가 전해지는 시조가 있다. "매화 넷 등걸에 춘절(春節)이 도라오니/녜 픠던 가지에 픠엄즉 하다마는/춘설(春雪)이 난분분(亂紛紛)하니 필락말락하여라"라는 시조가 그것이다. 매화나 춘설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넣어 지었으나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며칠 전에 모임을 함께 하는 시인으로부터 말린 매화가 들어있는 작은 봉투를 하나 받았다. 차로 마시면 좋다고 하여 집에 오자마자 서둘러 물을 끓였다. 적당히 식기를 기다려 말린 매화를 몇 송이 적시니 움츠렸던 매화가 기지개를 켜면서 몸을 편다. 주전자 안에서 마치 벌떼가 날아다니는 듯하다. 찻잔에 가만히 입을 대니 향기가 은근하다. 진한 향기가 나는 차를 달가워하지 않는 나에게는 매화차가 안성맞춤이다. 전화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니 되레 고맙다며 내년에는 더 많이 만들어 드리겠다고 한다. 나는 매화차를 아껴 마셔야겠다는 생각으로 차에 넣는 이파리를 줄였다. 한편으로는 매실을 맺을 수 없게 하고 그것을 즐긴다고 생각하였으나 이기심이 금방 잊게 했다.

들판에 황운(黃雲)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분명코 가을이다. 아침에 제법 찬 기운이 감돈다. 나는 지난여름의 녹색에 대한 그리움을 떨치지 못하고 가을을 맞고 있다. 그래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찻물을 끓인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안도현 시인의 '가을의 소원'을 읊조린다.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