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향(思鄕)
사향(思鄕)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9.26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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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화의 문학칼럼
한 채 화 <문학평론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에 운전을 하고 직장으로 향한다. 안개가 조금 끼었으나 그렇게 불편하지 않다. 게다가 이십여 년 이상 다닌 길이니 이 언덕 저 굽이가 모두 친숙하다. 운전석 옆 자리에 눈을 감고 앉아도 차가 흔들리는 것만으로 어디쯤인지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해서 생각해 보면 무엇을 보았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주변의 사물을 눈여겨보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달린 까닭이다.

글을 쓰는 일은 사물을 눈여겨보거나 소리를 귀담아 듣는 데에서 비롯한다. 하천을 핥아서 산으로, 산에서 하늘로 쓸어가며 하늘과 산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안개. 세레나데와 같은 귀뚜라미의 애절함.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과 만나야 한다. 즉 문학과 외부의 관계는 문학과 자연의 만남이거나 문학과 인간사의 만남인 셈이다. 나뭇잎 하나 떨어져도 감정이 일어나고 벌레 울음소리로도 충분히 마음을 끌 수 있는 섬세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시작된 시청각적인 미감의 경험은 연상활동 역시 시청각적인 형상이나 음향과 더불어 진행된다. 또한 표현을 위한 구상 역시 눈과 귀가 파악한 사물의 형상과 음향의 미적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연발생적으로 언어가 이루어지고 문장을 이루는 것이니 그야말로 자연의 이치에서 글을 얻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마치 섬세하게 용을 새기듯이 조각도를 정밀하게 들이대야 할 것이다. 너무 화려해서 글이 지니고 있는 광채를 죽여서는 안 되고, 너무 투박하여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도 곤란하다.

김병기 시인이 최근에 출판한 고향연가 '보름다리'(2008, 도서출판 직지)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표현으로 고향을 잃은 사람들에게 고향을 안겨준다. 그리운 말들을 하나씩 부르면 실타래처럼 많은 과거사(過去事)가 이어져 나온다.

붓들 수멍배미 함박골 둥글미 연등봉 수캣들 옹장골 왯골 너탯골 산솟골 사장거리 공회당 방앗간 두멍부 위침 아랫침 소리개 노루박골 큰골 작은골 굴박골 곤줄 쇳구덩이 주막거리 솔다백이 서낭댕이 (중략) 알고 보면 그리운 말들이 나를 키웠다.

- '그리운 말들이 나를 키웠다' 일부

어느 동네에나 있을 수 있는 말들이고 무심히 넘길 수 있는 말들이다. 그러나 시어 하나마다 시인의 시청각적인 경험이 배어 있어서 그 경험을 반추한다. 우리는 반추한 경험을 추억이라 부르며 그래서 고향은 과거 시제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고향은 변하였다. 고향에 찾아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다.

아이도 친구도 친구 아버지도/차에 깔려 죽은 보름다리/전에 살던 집에 가도 아는 이 없고/ 이 생각 저 생각에 돌아도/이젠 낯선 마을/ 아는 사람 만나면 안부를 묻는데/ 웃음이 화석이 된 사람들/ 소 잡고 객지 신세 묻는 이 없다/

-'고향에서' 나머지 생략

물론 현상이 변했다고 해도 본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듯 고향이 변하고 사람들이 바뀌어도 가슴속엔 누구나 과거 시제의 고향 어귀를 붙잡고 현재에 있다. 그들도 고향의 그리운 말들에 의하여 자라났다. 그리하여 오늘 고향을 잃은 독자는 시인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운 말들을 함께 불러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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