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밀라노의 패션과 예술정신
<146> 밀라노의 패션과 예술정신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9.23 22: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함영덕의 오버 더 실크로드
스칼렛극장
모던·고전 어우러진 문화 교차로에 서다

고대 건축물 보존-세계적 패션 도시 '이색 매력'
두오모 성당·스칼라 극장 주변 관광객들 넘쳐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삶의 흔적 곳곳에 고스란히


밀라노는 두 가지의 매력을 가진 도시이다. 수백 년 동안 보존되어 온 건축물과 예술작품들로 고딕 건축의
극장 앞 다빈치 상
최고 걸작이라고 일컫는 두오모 성당을 비롯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 같은 수많은 역사적 예술작품들을 손꼽을 수가 있다. 또 하나는 산업의 도시 혹은 세계적 패션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북부지방은 산업도시가 발전하여 이탈리아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으며 많은 세금을 내어 남부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고 하여 남북분리를 주장하는 불만의 목소리도 높은 편이다.

수입의 40%를 세금으로 내고 있으니 게으르고 놀기 좋아 하는 남부지방 사람들을 좋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세계 패션기업의 본사가 60%가 있으며 '밀라노 패션'이라는 말까지 유행시킬만한 저력을 가진 도시이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패션잡지에서 나온듯한 세련된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명랑하고 쾌활한 이탈리아인들의 성격과 예술적 감각이 결합하여 만든 세련미 때문일 것이다.

교통의 요지인 밀라노는 평원 가운데 우뚝 선 도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나라인 만큼 기후에 있어 북쪽과 남쪽이 큰 차이가 난다. 알프스 산맥에 접해있는 북부에 찬 겨울바람이 불어올 무렵 남부에서는 따뜻한 날이 계속된다. 8월의 강렬한 햇살 아래 오픈 칼라에 화려한 셔츠를 입은 남자들과 날씬한 몸매가 드러나는 육감적인 옷차림을 한 여성들의 개방적인 모습이 타오르는 태양 아래 유감없이 드러나는 거리엔 세련된 색상과 패션의 행렬을 실감하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와 같은 천재 미술가들과 수많은 대가들의 명작을 접하면서 자라왔기 때문인지 이탈리아인들의 디자인 감각과 색채 감각은 매우 뛰어난 것 같다.

밀라노의 주요 볼거리는 두오모 성당과 스칼라 극장 주변에 모여 있다. 스칼라 광장에 도착하여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스칼라는 밖에서 보기에는 생각보다는 규모가 그리 크게 보이지 않은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이다. 그러나 3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객석과 이곳에서 공연하는 조건은 매우 엄격하고 최고로 까다로운 극장으로 정평이 나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실크로 입은 옷만 입고 입장할 수 있을 만큼 명성과 권위를 지닌 극장이었다 한다.

조수미 씨가 공연을 한 적이 있고 정명훈은 자주 지휘봉을 잡았다고 한다. 스칼라 좌 앞 광장 중심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상이 저녁 햇살을 적시고 있다. 배 다른 형제 12명을 가진 아버지와 농부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인근 작은 지방도시 빈치 마을에서 태어난 세기의 천재 다빈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남다른 감회가 몰려왔다. 레오나르도 가족은 13세기 이래 빈치에서 줄곧 살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공증인이자 지주였다. 그의 아버지가 첫 부인을 맞이할 때 레오나르도는 태어나게 된다. 레오나르도 어머니 카타리나는 농부의 딸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 된다. 빈치에서 온 레오나르도가 서구 문화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현대의 상징이라 할 물건인 탱크와 날틀을 발명해 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남겼다. 그는 대단히 자유분방했으며 남색자이기도 했다. 예술과 엔지니어링 분야 모두에서 대단한 재능을 지닌 독창적인 화가이자 뛰어난 제도공이었으며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관해 끊임없는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과학자이기도 했다.

네오나르도는 잘생긴 얼굴에 비단결 같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지녔고 다양하면서도 매혹적인 화법을 구사하며 매우 세련된 옷매무세를 하고 다녔다. 그는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남색 성향에서 나오는 가까이하지 못할 분위기 때문에 여자들은 더욱 그에게 끌렸다. 그러나 궁정생활의 흥청망청함을 빼면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는 일개 화가였다. 메디치가의 치세였던 피렌체에서는 막 예술가들이 가져다주는 이점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밀라노에서는 그렇지가 못했다. 밀라노의 화가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얼마라도 돈을 벌려면 비굴하게 굴어야 했다.

그러나 다빈치의 우아하고 화려한 궁정생활에 비해 그의 가정생활은 정 반대였다. 당장 절실하게 필요한 품목을 작성하면서 입을만한 옷이 없다는 불평을 늘어놓을 정도로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밀라노에서 열린 2007 봄·가을 컬렉션

레오나르도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일찍부터 공책을 소지하는 습관 때문이다. 노트에 메모한 자료들은 지금도 남아 그의 명성과 르네상스 시대의 유품으로 중요한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발명품과 예술작품들은 독학으로 자연과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스스로 터득하고 창조한 세기적인 위대한 천재의 창조물이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 이룰 수 있을까를 증명한 영혼의 소유자이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그가 남긴 예술혼과 창작물들은 세계유명 박물관과 다빈치 과학기술 박물관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다만 그의 놀라운 두뇌와 예술적 천재성이 기대한 만큼 충분한 보상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삶은 흔히들 승리와 영광의 연속이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좌절과 가난 속에서 살았던 시간이 더 많았던 예술가이다. 자주 돈이 떨어졌고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없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