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日 최초 금속활자공 임오관(林五官)
<5> 日 최초 금속활자공 임오관(林五官)
  • 한인섭 기자
  • 승인 2008.09.22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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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임진왜란은 활자전쟁이었나
직지축제 행사장에 전시됐던 조선시대 복원활자와 활자 거푸집 틀.

임란때 끌려간 조선인 기술자 가능성

日, 폭풍우에 난파돼 떠내려온 명나라 상인 주장
국적 입증할 근거 미미… 한·일 학자 견해 상반


일본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든 임오관(林五官)은 조선사람인가, 명나라 사람인가.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 명령으로 1606년부터 1, 2, 3차 금속활자를 만든 주조공은 일본인이 아니었다. 일본은 그를 명나라 사람(唐人) 이라고 주장하지만, 국내 학자들은 임진왜란때 끌려간 조선인이라고 반박한다.

일본이 스루가 활자(駿河活字) 인쇄에 종사한 기술자와 주조 규모 등을 기록한 '준부기(駿府記)'와 '본광국사일기(本光國師日記)'에는 1606년 6월 4일 당인 임오관이 후시미(伏見城) 원광사(圓光寺) 학교에서 제1차 금속활자를 주조했다는 내용이 있다.

1615년 3월 1616년 4월 탄생한 2,3차 활자 역시 임오관이 슨푸성(駿府城)에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활자주조 기술자 임오관이 관심을 끌 수 밖에 없는 것은 일본 금속활자 역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일본 최초 금속활자공 임오관의 국적에 대한 한·일 양국 학자들의 견해는 엇갈린다. 임인호 금속활자 전수조교가 직지축제 행사장에서 활자주조 과정을 재현해 보이고 있다.

스루가 활자를 소장하고있는 일본 돗반박물관이 펴낸 '駿河版銅活字의 역사적위치'참고도표를 살펴보면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쓰, 후양성천황과 함께 인쇄출판 역사의 한축을 차지한다.

이 도표에 임오관은 1550년경 출생한 당인(唐人)에다 동활자기술자로 기술돼 있다.

업적을 기술한 란에는 1606년부터 1615년, 1617년에 있었던 제1,2,3차 동활자를 주조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다른 인물과 달리 사망 연도는 표시돼 있지 않은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다.

한·일 학계는 금속활자 스루가 활자(駿河活字)를 주조한 활자공 임오관이 귀화한 당인(唐人)인지, 임진왜란때 끌려간 조선 사람인지 여부에 대해 아직 명확한 결론은 없다. 하지만 견해가 상반되는 점만은 분명하다.

일본 학계는 동활자 주조 책임자였던 그를 명나라 사람으로 단정한다.

일본 학자 百瀨宏(모모세 히로시)은 스루가판 동활자 주조의 인맥적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당시 명나라에서 교역을 위해 동중국해를 항해하다 폭풍우에 난파돼 1574년쯤 하마마츠 해안에 떠내려온 복건성(福建省) 출신의 오관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당시 하마마츠성에 있던 이에야쓰의 눈에 들었다. 하마마츠성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의료를 잘 하고, 물품의 판매, 운반, 환전업에 통달해 이에야쓰는 1575년 주인장(朱印狀·직인이 찍힌 공문서)을 내려 각종 매매, 도항 관련 일에 대한 면허를 내줄 정도로 우대했다. 당시 명나라는 해외무역 증가와 함께 화폐경제가 크게 발달해 복건성 출신들이 큰 활약을 했다. 오관이 주장(鑄藏)에 정통했던 것은 고국 명나라에서 주전(鑄錢) 지식 또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바로 임오관이라는 설이 있다."

히로시는 또 임오관과 이에야쓰의 외교문서, 주인장 발급권을 갖고있던 관리했던 겐키츠(元佶), 슨푸성의 금은좌(金銀座·금화 은화 주조소) 감독관 고토와 수덴, 학승 도순(道春) 등 신임을 받았던 인물들이 물류, 화폐행정과 주조, 활자주조 문제를 서로 협의해 만들었을 것이라고 논문을 통해 주장했다.

히로시 처럼 일본 학계는 조선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화폐 주조기술을 배경으로 금속활자를 주조했다는 주장이 주류이다.

지난달 열린 직지축제에서 아이들이 미니어처로 된 활자주조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원로 고고학자 손보기 교수는 일본의 이같은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임오관이 조선에서 끌려간 기술자라고 단정한다.

손 교수는 그의 논문 '임진왜란과 일본의 활자 인쇄술'을 통해 "일본이 '군서치요'를 찍기위해 활자를 부어 낸 기술자 임오관을 당인이라 했지만, 조선에서 끌려간 인물"이라고 밝히고 "일본은 임오관의 지도 아래 최초 금속활자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손 교수는 "조선의 문화가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던 것은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좋은 미끼가 됐다. 임진왜란이 일자 태종∼세종 때 쌓았던 문화 전통은 일본에 의해 짓밟히고 많은 기술자는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이 주자학을 중심으로 하는 유가 통치법, 인쇄술, 도자기술이었다"고 밝혔다.

손 교수는 또 "도쿠가와 이에야쓰 주도로 만들어진 스루가 활자는 조선에서 가져간 놋쇠활자와 이를 본떠 새로 만든 구리활자였다"며 "이 때 만들어진 군서치요와 대장일람집은 조선활자와 나무활자, 일본활자를 사용해 만들었기 때문에 조선 처럼 하나의 활자로 만든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손 교수는 임오관의 활자 주조 작업에 목공이 둘, 글자 새기는 사람 셋, 판짜는 사람이 열명, 밀어내는 사람 다섯명이 도왔다고 밝혔다.

이들은 활자주조를 위해 교토에서 스루가와로 차출된 인물들이다. 또 교토의 5개 사찰(남선사, 천룡사, 상국사, 건인사, 동복사)에서 승려 2명씩 불려와 교정 작업을 했다고 설명했다.

손 교수는 1987년 NHK 초청으로 일본 돗반박물관이 소장하고있는 스루가 활자 감정 작업에 참여했던 내용을 이 논문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감정 과정에서 한 일본학자가 임오관이 중국 사람 아니겠냐고 주장 하길래 그 무렵 중국에서는 활자인쇄가 이뤄지지 않았고, 중국 사람 기술자가 끌려온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자신의 반박에 대해 방송사 책임자 역시 "중국인일 수 없다"며 동조했다는 내용도 소개했다.

그러나 손보기 교수 이후에 임오관이 조선인 이라는 사실을 뒷받침 할 근거가 없는 점은 아쉬운 점으로 꼽힌다.

옥영정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는 "임오관의 국적을 입증할 근거나 기록이 한, 일 양국 모두 미비한 실정"이라며 "이 분야에 대해 밀도있게 연구한 학자가 없어 주조기술과 전후 사정 등 고려해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 이라는 주장이 전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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