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아다리에서 쓴 편지
방아다리에서 쓴 편지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9.18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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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교의 방아다리에서 쓴 편지
김 익 교 <전 언론인>

추석이 지났는데도 연일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립니다. 아침 저녁으로 꾀꼬리가 아직도 울고 밤에는 소쩍새가 목을 놓아 웁니다. 먼길을 언제 갔다 오려고 갈 생각들을 안하니 아주 붙박이로 터를 잡으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하늘은 높아 집니다. 얇게 퍼진 솜털구름이 파란하늘에 이불을 깔고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무리지어 곡예비행을 합니다. 들녁에 벼이삭들이 점점 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합니다.

"아이구 우리 애기 이제 슬(설) 때나 오겄네, 아빠 엄마 말 잘 듣고 잘 놀아라. 어여들 가 차조심 하구…." 차례 지내고 남은 음식과 참깨·고추 등 바리바리 싸서 보내는 이웃들의 표정이 쓸쓸해 보입니다.

구두코가 반짝 거리는 양복쟁이들이 오가고 승용차들이 들락거리는 등 한 사흘 시끌벅적 하던 마을에 다시 정막감이 돕니다.

어제의 일입니다. 비닐하우스를 가려고 토종벌통옆을 지나는데 난리가 났습니다. 엄지손가락 만한 장수말벌들이 떼로 몰려 벌통을 에워 싸고 콩톨만한 것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는게 아닙니까. 허리가 잘리고 목이 잘린 토종벌들의 주검이 수북하고 벌통속으로 들어가려는지 수십마리가 엉겨 붙어 입구를 갉아대는 소리가 서걱서걱 합니다. 당장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벌초하다 벌에 쏘여 사망하는사례가 뉴스에 나오고 특히 장수말벌은 농촌에서도 조심하고 경계하는 위험한 곤충입니다.

얼마 전부터 가끔 한마리씩 벌통 앞에 보여 은근히 걱정은 됐지만 이렇게까지 될줄은 몰랐습니다. 아주 이날을 디데이로 잡았는가 봅니다. 치미는 울화를 누르고 집으로 내달아 겨울바지에 장화를 신고 가죽코트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모자위에 양파자루 같은 안전망을 덮어 썼지요. 고무장갑을 낀 손에는 파리채 하나를 들고….

한 20여분, 어깨가 뻐근하도록 휘두른 파리채가 찢어질 즈음 전투가 끝났습니다.

장수말벌! 참 대단합니다. 안전망 위로 달려 붙을 때 독침에 이슬방울 같은 독물을 매달고 있습니다. 독침공격이 안되니까 공중에서 독물을 뿌리기까지 합니다. 제 몰골도 말이 아니지요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한겨울 옷을 입고 양파자루까지 뒤집어 쓰고 후다닥 거렸으니 온몸이 땀 범벅이 되고 누가 봤으면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장수말벌이 벌통을 탐하는 것도 자연의 섭리인데….

이곳으로 온후 어쩔 수 없이 독사 몇마리는 처치했어도 이렇게 많은 살생을 하기는 처음입니다. 그러니 어쩝니까. 아내도, 손녀 보경이도 수시로 오가는 밭으로 가는 길목인데다 또 몸에 좋다는 토종꿀을…. 그런데 오늘 보니까 또 왔어요. 아무래도 파리채를 몇개 더 준비해야 될 것 같습니다.

무, 배추밭에 물주고 마무리 고추따기 등 다시 일손을 잡은 이웃들이 허전해 보입니다. 아기새들이 날아간 빈둥지에 틀어박혀 꼼짝을 않는다는 어미새의 '빈둥지 증후군'이 떠올려집니다. 한가위보름을 지난 달이지만 그래도 밝네요. 누가 그러데요. 소원하나 달에 걸어 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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