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계절
시인의 계절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9.12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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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화의 문학칼럼
한 채 화 <시 인>

며칠 전부터 왼쪽 눈의 흰자위에 핏발이 서더니 점점 붉기가 더한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눈을 씻지 않았는지 돌아본다. 게다가 눈두덩이까지 좀 붓기도 하니 불편하기가 여간이 아니다. 부득이 병원을 가니 의사가 눈을 보자며 눈속까지 들여다본다. 내 정신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지 않을까 걱정이다.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줄까 걱정하여 안대를 붙이고 다니니 나머지 오른쪽 눈마저 피곤하고 힘들다. 인체 어느 한 부윈들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깨닫는다.

의사는 눈을 과로하여 SOS를 보내는 것이라며 휴식을 권하니 눈을 쉴 겸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이 맑아진다. 꿈엔 듯 아닌 듯 풀벌레 소리도 요란하다. 가을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풀벌레의 울음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이때가 지나고 나면 하늘은 쪽빛이고 시계(視界)가 넓고 멀다. 또한 누런 구름이 들판을 덮으니 온 세상은 황금빛이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풍요가 넘쳐난다.

풀벌레의 울음소리는 물론 낮에도 멈출 리 없겠지만 밤에 더욱 요란하다. 그 까닭은 밤이면 사위(四圍)를 볼 수 없기 때문일 터이다. 즉 눈을 감고 귀만 열어놓은 꼴이니 밤벌레 울음소리가 잠자던 영혼을 깨운다. 사물은 눈과 귀를 통하여 정신과 접촉된다(物沿耳目)고 하니 볼거리 들을 거리가 특별히 많은 가을은 조용히 성찰하는 계절이다. 누구나 내면으로 길을 내고 그 길을 따라갈 일이다. 가을을 조락(凋落)의 계절이라 함은 이런 데서 연유한 것이리라.

달이 오르면/수십 개의 건반이 울린다/흐드러진 몸짓이 팽팽한 달 속에서/음표로 쏟아지고//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달은/산등성이 거친 숨을 토한 후/한 사위를 긋는다//달이 기웃거린 자리/소름처럼 돋는 마침표//달오름모두(류재화,나팔꽃 연서, 고두미, 2006)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며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달이 오르는 시각적 이미지를 "수십개의 건반이 울린다"고 청각화한다. 흐드러진 달빛을 음표로 형상화한다. 오르는 달과 수십개의 건반이 울려 내는 소리와 달빛을 따라 높낮이와 장단을 달리하는 음표들은 이 시편을 감각적이면서도 환상적으로 만든다. 이어서 주체인 달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사위를 긋는 몸짓을 보고 있다. 이러한 형상화를 바탕으로 달과 배경이 조화를 이루면서 마침표를 찍는다. 여행이 끝난 곳에서 다시 길을 열어 간다.

자연이 인간에게 감동을 일으키는 최초의 단계는 형상과 음향의 아름다움으로 작가의 생각을 일으키고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한 이렇게 시작된 시청각적인 미감의 경험은 연상활동 역시 시청각적인 형상이나 음향과 더불어 진행된다. 또한 표현을 위한 구상 역시 눈과 귀가 파악한 사물의 형상과 음향의 미적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을에는 시인이 아니어도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에 감정이 일어나고 벌레 울음소리에도 마음이 끌린다. 아니 모두 시인이 되어보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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