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미학
촛불의 미학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6.13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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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화의 문학칼럼
한 채 화 <문학평론가>

별일이다.

전깃불에 밀려 뒷자리에서 불이라는 이름만 유지하던 촛불을 향해 시위하는 사람도 몰려들고 시위를 제지하려는 경찰도 몰려든다. 촛불이 하루 아침에 귀한 신세가 되었으니 별일은 별일이로다. 자고 일어나니 영웅이 되었다. 어찌 되었건 촛불이 시위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치의 상징이 된 듯하며, 반면에 경찰들에게는 반가치의 상징인 셈이다.

촛불에서는 난로의 불과 달리 몽상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난로의 불은 연료를 넣고 꼬챙이로 쑤석거려야 강렬하게 타오른다. 그리고 그것은 내버려 두면 이내 불꽃이 가라앉아 버리기 때문에 더 타게 하려면 연료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촛불은 처음부터 저 혼자서 타며 스스로 연료를 마련하기 때문에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고독하게 같은 불꽃으로 탄다.

시위의 촛불이라고 다르지는 않다. 아무도 부추기거나 쑤석거리지 않았지만 시민들의 뜻이 담긴 촛불은 꺼지지 않고 끊임없이 타오른다. 연료를 공급하지 않았지만 한 달이 넘게 경향 각지에서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시위의 파도는 촛불처럼 에너지를 어느 정도 자가발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촛불을 통한 시민들의 호소를 알고 있는 관계자들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 있다. 그래서 시위자들은 참가자의 숫자에 관계없이 고독하다. 나는 촛불을 바라보듯이 수많은 시민들을 보며 몽상에 젖어든다.

촛불 밑에서는 깊은 잠이 들기 어려우며, 밤의 몽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과거의 모든 추억을 되살려 준다. 그리하여 상상력과 기억력이 일치하는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촛불은 우리로 하여금 지난 시간을 회상하도록 하는 것이다. 올해 6월10일의 촛불이 그러해서 사람들은 6·29를 이끌어냈던 과거의 6·10 항쟁을 회상한다. 다만 양자 모두 그때처럼 폭력을 쓰려고는 하지 않는다. 폭력은 폭력을 부를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시위자들이나 제지하는 자들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6·10항쟁이라는 과거에 대한 회상이 기억력에 의존한다면 비폭력으로 대립하는 방식은 상상력의 소산이다.

고고하게 타는 촛불에 대한 동경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나방의 굴광성(phototropisme)이다. 나방은 촛불에 매력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 불꽃에 몸을 던져 황홀경 속에서 타 죽는다. 그렇듯이 오늘의 우리는 촛불 앞에 너와 나의 구별없이 몸을 던진다. 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였건만 그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타 죽을 각오로 모여든다. 높은 곳에서 촬영한 듯한 텔레비전의 화면을 보면서 나방의 굴광성을 생각한 것이 나만은 아니었을 터이다.

촛불은 그 자체의 모습만을 놓고 관찰해보면, 불꽃이 붉은빛과 흰빛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흰빛은 뿌리 쪽의 파란빛과 연결되어 있어 사회의 부조리를 일소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붉은빛은 심지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불순물과 더러움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둘의 투쟁이 하나의 변증법을 이루면서 탄다. 즉 촛불은 흰빛의 상승과 붉은빛의 하강, 가치와 반가치가 싸우는 결투의 장인 것이다.

6월10일 세종로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구름처럼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피켓을 든 사람, 북을 둘러멘 사람, 넥타이를 맨 사람에 흰 가운을 입은 의사도 있다. 어린 학생이 있는가 하면 머리가 반백을 넘어선 중년의 나그네도 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손은 너나없이 아름다운 촛불을 들고 있다. 비폭력의 강력한 메시지를 들고 있다. 부디 꺼지지 말고 우리의 푯대가 되길 바라며 가스통바슐라르에게 고마운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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