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
미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6.11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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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김 혜 식 <수필가>

창밖엔 비가 내린다. 내리는 비 탓인가. 계명산 자락을 수놓은 녹음방초가 오늘따라 유독 그 푸른빛을 더하는 듯하다. 누가 6월을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고 노래했던가. 날로 푸름을 더해가는 신록이 꽃처럼 아름답다. 마치 초록 융단을 깔은 듯 한 산자락에 머물던 나의 시선이 음울한 회색빛 하늘가에 머물자 왠지 갑자기 마음이 우울했다. 요즘 내 마음이 젊은 날과 달리 날씨 따라 자주 변하는 등 기복이 심해졌다. 우울한 마음을 전환 할양으로 유행가를 불렀다.

집안 청소를 하며 유행가를 흥얼거리던 나는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는 가사가 마치 한편의 시처럼 느껴졌다. 유행가는 인생사를 겨냥해 사랑, 혹은 이별에 관한 노래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유행가 중에 흔히 말하는 나의 18번()을 손꼽으라하면 가수 장현의 '미련'이란 노래다. 평소 난 그 노래를 즐겨 부르곤 한다. '미련'은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 한껏 표현된 노래이다. 그 노래를 부르노라니 애조 띤 음색에 어느덧 취하여 실체도 없는 그리움에 괜스레 가슴이 뻐근했다.

한편 이 나이에 아직도 마음 자락에 그리움이 고여 있음을 알고 새삼 놀랐다. 이젠 젊은 날 지녔던 뜨거운 정염의 불꽃도 사위어 마음 밭이 바짝 메마른 줄 알았었는데 날씨 탓인가. '미련'이란 노래를 입속으로 나직이 부르던 나는 대상 없는 막연한 그리움에 눈시울이 붉어지며 급기야 목까지 메었다.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갈 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랑/ 코스모스 길을 따라서/끝이 없이 생각할 때에/ 보고 싶어 가고 싶어서/ 슬퍼지는 내 마음이여'

나의 메마른 감성을 눅눅히 적시우고 눈물샘을 자극한 이 노래가 내포한 의미는 무엇일까 열렬히 사랑했지만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던 연인들의 애달픈 마음일까 혹은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가슴앓이일까 아마도 이 노랜 듣는 이마다 제각기 감흥이 다를 것이라는 해석을 나름대로 해본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이루어진 사랑보다 미련이 더 진하기 마련인가 보다. 이 노래의 '갈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랑'의 가사에 그 애절함이 절절이 묻어난다.

우리네 인생사에 애틋한 그리움으로 남는 게 어찌 이루지 못한 사랑뿐이랴. 되돌아보니 나또한 삶 자체가 그리움이고 미련으로 남을만한 일들이 대다수인 듯하다. 지난날 삶에 부대끼며 입었던 마음의 상처도 돌이켜보니 내면의 성숙을 돕던 채찍이 아니었던가. 그땐 왜 용서엔 그토록 인색했었을까 하는 아쉬움, 젊은 날 가슴에 품었던 꿈을 이루지 못한 미련들이 늘 그림자처럼 나를 뒤따랐다. 이젠 나를 속박하던 온갖 미련들로부터 훌훌 벗어나고 싶다. 굳이 방하(放下)를 들먹이지 않아도 헛된 욕망으로 점철된 인생사에서 한발 비켜서는 지혜로움도 갖춰야 할까 보다.

작년 초겨울 직장에서 유능한 젊은이로 촉망받던 남동생이 졸지에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하자 나의 인생관이 돌연 바뀌었다. 동생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내 자신을 돌아본 것이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인간사인데 짧은 생 그 무엇을 더 움켜쥐려고 그토록 발버둥쳤단 말인가'라는 자성을 통하여 가슴에 심장이 힘차게 뛰고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고 행복이라는 귀결에 이르자 세상사에 연연했던 내 마음이 다소 가벼워지는 듯 했다. 그런 내게 '미련'이란 유행가 한 곡조가 더욱 나의 심연을 깊이 응시케 하였다.

먼 훗날 삶을 마감할 때 '이것만은 정녕 행하지 말았어야 했는데'하는 가슴 치는 후회를 할 일은 행하지 않았을까 '이것만은 꼭 행했어야 하는데' 하는 아름다운 미련이 남을 일은 무엇일까 요즘 나는 목하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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