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같은 자운영
봄비 같은 자운영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5.02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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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화의 문학칼럼
한 채 화 <문학평론가>

내 이름은 선친께서 지으셨는데 가운데 '채(埰)'자를 돌림자로 하고 끝에는 무엇이 되라는 뜻으로 화(化)를 붙여 지으셨다고 한다. 성과 함께 뜻을 정리하면 나라의 녹봉을 받는 인물이 되라는 뜻이니 벼슬하라는 뜻으로 좋게 해석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정한 봉급을 받아 생활하고 있으니 아마 내 이름대로는 사는 셈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여자 이름 같다느니, 화류계에 어울리는 이름 같다느니 말도 많다. 물론 가끔은 이름이 참 예쁘다고도 한다. 아마 이런 생각들의 바탕에는 많은 이름을 대하면서 굳어진 관념들이 자리 잡고 있을 터이다. 그리하여 이름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그 고정화(固定化)된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이리라. 어쨌든 내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대체로 잘 기억하는 편이니 선친께서 자식의 이름을 잘 지어준 셈이다.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래, 노루, 프랑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누구나 잘 아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의 일부이다. 별처럼 아스라이 멀리 있는 이름들을 부르면 그 이름들이 화자에게로 달려와서 그리움이 된다. 무심히 지나치면 아무리 많은 것을 보아도 뜻이 없고, 하나를 보아도 이름을 불러 주면 나에게로 와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이는 마치 앞을 잘 보고 달려온 운전자에게 무엇을 보았는가 물었을 때에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처참하게 죽은 고양이를 보고 '아, 가엾은 고양이'라고 외쳤다면 그 운전자는 고양이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고양이의 죽음이 그의 귀가를 기다리는 가족에게는 커다란 슬픔이 된다는 것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길거리에서 낯선 체험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착지에서 그 낯선 체험을 기억하는 것처럼 그가 나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김춘수의 '꽃'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쓴 시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다오 나도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는 시구(詩句)에서 이름 앞에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이라는 수식어를 넣었다. 이는 이름이 곧 그의 개성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즘 가장 흔한 호칭이 '사장님' 아니면 '선생님'이다. 회사를 경영하는 대표 이사도 아닌데 사장이라 부르니 사장이 되고 싶은 사람이 많은 세상인가 보다. 선생님이 많은 것을 보면 선생님이 되고 싶은 사람도 많은 모양이다. 어릴 적 이름이나 별명을 불러야 좋을 초등학교 동기를 만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날로 푸르름을 더해가는 넉넉한 계절 5월. 많은 이름을 부르고 싶다.

초등학교 시절에 노래 잘 부르던 신영이, 망월동에서 편히 잠들지 못한 5월. 봄비 같은 자운영, 할머니 산소의 할미꽃, 아스팔트 위에서 잉태하지 못한 몸을 뒤척이는 버찌. 그들의 빛깔과 향기에 어울리는 이름을 부르고 싶다. 그들이 나에게로 와서 의미가 되고 나도 그들에게 의미로 다가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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