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말걸기
‘너’에게 말걸기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4.18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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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화의 문학칼럼
한 채 화 <문학평론가>

출근하려고 아파트 문을 열고 나가니 앞집 아주머니가 배달된 신문을 집어 가면서 황급하게 문을 닫는다. 우리가 이사온지 1년6개월이 되었건만 아직도 서먹하다. 물론 이러한 사정은 사교적이지 못한 나의 성격이 원인이겠지만 문만 닫으면 바깥세상과는 소통이 단절되기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예전처럼 담 너머 이웃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지내던 때와는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그런 까닭인지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자신의 이야기를 주로 한다. 글도 온통 내 이야기다. 내 이야기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내 이야기가 아니라 '너'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소설에서의 시점이 대개 나이거나 그 혹은 그녀이지만 '너'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틀을 갖추게 될 것이며, 또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물론 글을 쓰는 사람이 감옥과 같은 일정한 틀에 갇혀 답답함을 느끼게 되면 변화를 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너'에 대한 이야기는 쓰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쓰는 사람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어서 소설의 형식으로서 검증을 마쳤다고 보기에는 이르다.

그런데 신경숙 소설가가 네 이야기를 시도하였다. '엄마를 부탁해'(창작과 비평, 2008년 겨울호)가 그것으로 엄마를 잃어버리고 나서 늘 친숙하던 엄마에 대해 새롭게 인식해 가는 이야기이다. 장편 연재라 하니 내용을 속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나'가 아닌 '너'에 대한 글쓰기라는 관점에서 다가간다.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너는 너의 엄마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엄마가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해야 누그러지는지 엄마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하는지. 누가 지금 엄마가 뭘 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으면 고사리를 말리고 있을걸요, 일요일이니 성당에 가셨겠는데, 십초 내에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너의 생각은 지난 여름에 조각이 났다. 엄마에게 너란 존재가 딸이 아니라 손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네가 느낀 것은 엄마가 너 앞에서 집을 치울 때였다.(360쪽-361쪽)

주인공인 너는 엄마가 늘 곁에 있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네 앞에서 집을 치우는 엄마의 낯선 모습을 통해 엄마와의 거리를 느낀다. 엄마와 '너'의 거리는 '너'가 엄마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는 시발점이다. 동시에 엄마의 입장은 딸에 대하여 새로운 기대 지평을 가지면서 자아를 확인하게 되며 이는 자아의 분열인 셈이다. 대개 이런 경우 보이는 모습만을 서술할 가능성이 있지만 서술자가 '너'의 내면까지를 넘나드는 점이 독특하다. 독자들의 기대를 넘어선다.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내면을 지향한다면 '너'에 대한 이야기는 주인공 '너'와 서술자 사이의 소통을 시도한다. 다시 말하면 '나'에 대한 이야기가 닫힌 구조라면 '너'에 대한 이야기는 열린 구조인 셈이다. 따라서 '엄마를 부탁해'를 읽는 독자들은 모두 주인공인 '너'가 되어 서술자와 대화를 시도하게 된다. 주인공의 이야기가 독자 일반으로 확장되어 독자들은 주인공인 '너'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값 비싼 옷이라고 해도 입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면 결코 좋은 옷일 수 없다. 즉 옷은 그 자체로서의 가치보다는 입는 사람과의 조화 속에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의 틀과 내용도 비슷하여 아무리 좋은 글쓰기 방식이라고 해도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기는 힘들다. 이 말은 글쓰기 방식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에 부합할 때에 가치를 갖는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독자들의 주목에 값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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