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궁전을 바라보며
월궁전을 바라보며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15.03.2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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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철옹성이다. 날카로운 가시로 장벽을 세우고 거부의 몸짓이 완강하다. 잠시 집게를 쥐고 있는 손이 머뭇거린다. 방심하면 두 손을 가시밭으로 내어줄 게 뻔하다. 장갑을 끼고 신문지를 구겨 둥글게 말아 보호막을 만든다. 

조심스럽게 선인장을 들어 올려 새 화분에 분갈이를 끝내고 한숨을 돌린다. 더 좋은 환경으로 옮겨 주기가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어디 선인장을 키울 수 있을까 싶어 투덜거리며 선인장을 살펴본다.

둥글둥글한 모습이 보면 볼수록 이름처럼 달을 닮았다. 직렬과 병렬로 이루어진 가시 배열은 일부러 자를 대고 선을 그어 열을 맞추기라도 한 듯하다. 어찌나 오묘한지 바라볼수록 탄성이 절로 나온다. 미처 깨닫지 못한 선인장의 신비로운 매력이다. 

눈을 가까이하고 살펴보니 뽀얀 솜털이 날카로운 가시를 감싸 안 듯 보듬고 있다. 그 사이로 선홍빛이 감도는 꽃눈이 세상구경을 하려는 듯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꽃대를 밀어올리는 게 분명해 보이는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감으로 설렌다.

예전에는 가시가 빼곡한 선인장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날카로운 가시가 마치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 오만함으로 보여 싫었다. 무엇보다 꽃을 피워 올리기까지 긴 시간의 기다림이 조급한 내 성미에 맞질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기다린 끝에 피워 올린 꽃을 즐겨볼까 한껏 분위기를 잡으면 어느 사이 화사한 꽃은 시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긴 기다림에 비해 몰락은 어찌그리 허망한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상실감으로 허탈했다.

서둘러 찻잔을 준비하고 말간 유리 다관에 노란 산국을 우려내기 시작했다. 녹두알 만한 꽃봉오리가 개화를 시작한다. 투명한 유리 주전자가 서서히 엷은 노란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봄 햇살과 가을의 그윽한 국화향이 아름다운 선율이 되어 오감을 두드린다. 겨자씨만 한 월궁전의 꽃눈과 국화차의 향기에 바쁜 내 일상에도 잠시 여백이 생긴다. 

헤아려보면 앞만 바라보며 허둥지둥 살아온 날들이었다. 뒤도 돌아볼 여유 없이 바쁘게 살 다 보니 감성이 무뎌져 갔다. 

무뎌져 가는 감성만큼 성격도 둥글둥글해졌으면 좋았으련만 선인장처럼 온몸에 가시를 하나하나 촘촘하게 만들며 살았다. 그래서였을까. 가슴으로는 늘 바람이 일었다. 그럴 때마다 습관처럼 차를 우려 나만의 베란다 정원을 찾았다.

찻잔에 차를 따랐다. 눈으로 국화의 환생을 즐겼으니 이번에는 코끝으로 향기를 즐길 차례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알싸하면서도 향기로운 기운이 온몸으로 흐른다. 

눈을 감았다. 녹두알 만한 꽃과 가시투성이인 선인장이 죽비가 되어 어깨를 내리친다. 정신이 번쩍 든다. 선인장의 가시는 세상과 공존하며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진화였지만 내 마음에 두른 가시는 세상과 상생하며 살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자각한다. 온몸에 쓸모도 없는 가시로 장벽을 만들어 그 가시가 때로는 다른 이들을 찌르며 상처를 입혔을 것이고 나 자신도 찌르며 아파했을 터였다. 그것이 자존감인양 온갖 체를 하며 살아왔으니 지금까지 공염불만 했다.

가시 사이로 내민 꽃눈을 바라본다. 꽃이 활짝 피어나는 날 인고의 세월을 감내한 월궁전 앞에 서면 내 마음속의 뾰족한 가시도 조금은 무뎌지기를 바라며 두 손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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