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가 500호 동학혁명때 불타"
"민가 500호 동학혁명때 불타"
  • 심영선 기자
  • 승인 2014.08.25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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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향토사연구회, 괴향문화 22집서 자료 공개
120년 전 일어난 동학혁명 때(주갑 周甲·120년) 괴산군엔 민가 500여 호(戶)와 관가가 불에 탄 것으로 드러났다.

25일 (사)괴산향토사연구회 김근수 회장(중원대 향토문화연구소장)은‘괴향문화’ 22집을 발간하면서 ‘괴산의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고찰’에서 관련 자료를 통해 이를 공개했다.

이 고찰 자료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에 1894년(고종 31) 10월29일 임금이 괴산군의 불타버린 민호를 구제할 것을 충청감사에게 명한 것으로 기록했다.

고종은 “충청감사 장계를 보니 괴산군이 비적(匪賊)들의 소요를 겪으며 불에 탄 민가가 무려 500여 호나 된다. 죄 없는 불쌍한 백성이 적의 피해를 참혹하게 봤으니 죽은 사람은 이미 더없이 불쌍한 데다 산 사람도 어디에 의뢰하겠는가”라며 백성을 구제 하도록 명 했다.

이어 고종은 공납에서 돈 1만 냥을 나눠주고 불에 타 죽은 사람의 생전 신역(身役)·환곡(還穀)·군포(軍布)는 모두 탕감하고 산 사람은 살 곳을 얻도록 했다.

당시 동학농민혁명군의 공격을 받은 괴산 읍내는 민가 500여 호와 관아 건물이 불탔고 아전과 주민 11명이 사망, 30여 명이 다쳤다.

1894년 군·현의 읍내가 입은 피해 가운데 경상도 성주·하동과 함께 가장 컸던 사건으로 기록됐다.

이때 괴산 읍내에는 관아에 있던 동헌(괴산경찰서 앞) 1동만 남았다.

1988년 충북도 유형문화재 163호로 지정된 이 동헌은 일제강점기 이후 관청 건물과 괴산엽연초생산조합 관사로 쓰였다가 1996년 보수할 때 동헌 건물로 복원했다.

괴산 읍내가 이처럼 불에 탄 것은 피살된 동학 서(徐) 접주의 13살 아들이 아버지 원수를 갚겠다며 관아에 몰래 들어가 불을 놓은 데서 시작됐다.

이어 10월15일 일본군 27명이 괴산에서 동학혁명군과 접전을 벌이다 패해 돌아가는 등 두 차례 전투로 괴산 읍내는 초토화됐다.

동학농민혁명군에 참여한 괴산 출신 인물은 1894년 충주와 괴산지역에서 활약한 홍재길(洪在吉), 양반 신분으로 2세 동학교주 최시형의 은신처를 주선한 접주 이헌표(李憲表), 대도주 이원익(李源益) 등 문헌 등재와 후손이 등록한 괴산 출신 동학농민혁명군 참여자는 14명이다.

김 회장은 “괴산의 동학농민혁명은 충북 중부권 중심 활동의 근거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2세 동학교주 최시형의 은신지 ‘신양동(新陽洞)’ 등 관련 지역 조사와 참여 인물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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